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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역사는 회복 후에도 여러 후유증을 남긴다. 긴 터널을 지나 온 사람이 다시 삶을 살아나가기 위한 방법은 그저 잊어버리려는 노력만이 정답일까. 영화 <피닉스>는 지난 어둠을 마주보는 용기와 싸움의 이야기다.
망각하(려)는 자
망각은 개인의 의지와는 별도로 무의식의 도식 중 발생하는 작용이다. 물론 특정 기억과 경험에 대한 경중은 있겠으나 이것을 잊거나 기억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듯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때로 의지적인 망각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은 대체로 두 가지의 경우이다. 하나는 괴로움의 깊이가 너무 커 그 기억이 현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 우리는 뇌의 활동과 별개로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의지적으로 노력한다. 또 하나는 그 기억이 죄의식의 얼굴을 띄고 있을 때 이다. 죄의식은 마치 신발 속의 모래 같아서 희미한 형태로 계속해서 의식에 침범하지만 막상 털어내려 뚜껑을 열면 심연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다. 이 자맥질하는 죄의식을 끄집어내길 거부하고 눈감아버리는 행위, 이 또한 의지적인 망각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작은 물음이 든다. 이런 망각이 정녕 특정 기억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인가? 고통의 기억이든, 외면하고 싶은 죄의식이든 간에 과연 우리는 망각과 소멸의 빈 공간위에 새로운 기억을 온전히 심을 수 있을 것인가?
영화 <피닉스>는 펫촐트 감독의 역사 3부작 중 하나로 불리는 작품이다.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피닉스>는 망각을 선택하면 할수록 내면 더 깊은 곳에 도달하는 어떤 흔적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이 흔적을 보지 않으려 고개 돌리는 우리의 얼굴 앞에 온전치 못한 상처 투성이의 신체를 들이밀며 망각과 싸우는, 여전히 ‘존재함’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으로
때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넬리(니나 호스)는 심하게 다친 얼굴을 붕대로 감싼 채 고통과 싸우며 고향으로 돌아온다. 성형수술로 다시 일상생활이 가능해진 넬리는 전쟁 중 헤어 진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필드)를 찾기 위해 온 마을을 떠돌며 전전긍긍한다. 도시는 전쟁 후 폐허가 되어 있다. 처참해진 도시의 이곳저곳을 떠돌던 넬리는 <피닉스>라는 어느 외진 골목의 술집에서 그렇게도 찾던 조니와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조니는 성형수술로 외형이 바뀌어버린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넬리에게 죽은 아내 ‘넬리’역할을 대신 해 줄 것을 제안한다. 자신에게 상속된 유산을 가로채려는 조니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떠날 수 없던 넬리는 결국 전쟁 전, 변하기 전 모습을 가진 ‘넬리’를 연기하기로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존재와, 기억과 싸워야 했던 넬리. 출처: 네이버영화
존재를 둘러싼 비극에 대하여
<바바라>, <트랜짓>과 함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역사 3부작으로 불리는 <피닉스>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지닌 아우슈비츠 생존자를 등장시켜 기억 그리고 망각을 이야기 한다. 매 작품 전쟁의 역사와 더불어 전 후 독일사회의 회복과 책무에 화두를 던지는 페촐트는, 도시라고 하는 현대적 공간속에서 비극의 상흔을 지닌 인간 그리고 사랑의 관계라는 소재를 탁월하게 엮어낸다. 특히 도시와 복원이라는 화두를 영화 곳곳에 설치해두는데 이는 최근 국내 개봉했던 <운디네>에서 도시개발 역사학자와 물의 정령이라는 신화적 존재를 등장시켜 폐허가 된 도시와 건축물, 그 위에 새롭게 지어진 현대도시라는 테마로 시간의 흔적과 기억을 소환한다. 그만큼 페촐트의 영화는 기억, 흔적, 상흔, 복원같은 코드를 연결고리삼아 역사에 대한 현대적 인식을 재검하고자하는 남다른 통찰이 담겨있다.
<피닉스>는 사랑하는 남편과 다시 행복했던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고 믿는 희망에 찬 넬리의 이야기이자, 그러기 위해 현재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과거의 자신을 만들어내야 하는 당혹감 속에 갇힌 넬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런 넬리의 벅찬 기대와는 별개로 넬리는 남편에게 지워진 자, 즉 ‘망각된 자’라는 사실이다. 이는 과거의 넬리 그리고 현재의 넬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우슈비츠에서 사라진 존재로 남편에게 인지되고 있으므로 ‘없는’ 존재이면서도, 복원수술로 이전 넬리의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없는 존재, 다른 존재로 여겨지는 인식 속에 넬리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증명해야하는 곤란한 논리 가운데 함몰되어 버린다. 그러기에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은 존재하고 있음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 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존재 자체를 본인 스스로가 증명해야만 한다는 아이러니에 있다.
영화는 존재하는 비극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증명해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그렸다. 출처: 네이버영화
망각이 아닌 기억으로 존재하다
눈앞에 아내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는 그녀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과거 넬리가 입었던 빨간 드레스를 그녀에게 권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 빨간 드레스를 입으면 모두가 넬리가 돌아왔다고 생각할거야”
이 때 넬리는 진짜 ‘넬리’를 증명하는 것은 빨간 드레스가 아닌 아우슈비츠의 흔적임을 말한다. 더 이상 빨간 드레스의 넬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끔찍한 고통과 상처로 성할 곳 하나 없는 신체와 마음을 가진 그녀야 말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넬리인 것이다. 그러나 조니는 아우슈비츠의 흔적을 망각해야 한다며 그녀의 말을 묵살하고 만다. ‘이제 그만 잊으라’는 조니의 말은 그 순간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하울링처럼 울리고 울려 우리의 현실에 머문다. ‘이제 그만 잊으라’라는 조니의 말이 어느 순간 서늘한 공명이 되어 ‘역사의 비극은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처럼 들리는 건 비단 나뿐일까? 실제 독일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아우슈비츠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독일의 역사가 그렇고 대한민국의 역사도 그러하다. 고통의 기억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스리슬쩍 비극의 이전 시기로 되돌아가려는 수많은 사람들, 수없이 자행되는 시도. 그러나 그 안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지닌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그들의 상처를 함께 품을 용기가 없어 고개 돌리고 있는, 의지적으로 망각을 선택한 이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넬리는 역사의 고통을 겪어낸 자신을 인정하고 존재를 증명해낸다.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의 엔딩. 넬리는 결코 자신이 이전의 넬리가 아닌, 역사의 고통을 오롯이 새기고 재건된 존재임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빨간 드레스와 걸음걸이가 아닌 팔에 새겨진 숫자로 자신을 증명하는 넬리. 이 증거 앞에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지금의 넬리를 부정할 수 없다. 아우슈비츠를 지우려 하는 어떠한 시도도 말이다. 이런 넬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조니와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넬리는 환한 빛 가운데로 사라진다. 피닉스, 스스로를 불태우고 다시 태어난 불사조처럼 기억을 몸에 쓴 채 소생한 존재로 말이다.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