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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4. "모쿠슈라!"
가을과 겨울 동안 붙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탈고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어수선한 책상 주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문득 보니 사방이 어수선했습니다. 플레이어도 없어 이제는 볼 수도 없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DVD 케이스들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습니다. 버리려고 마음먹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막상 손에 들면 그것을 샀던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버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먼지를 털며 하나씩 제목을 들춰보던 중, 유독 시선을 붙드는 케이스가 하나 있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힐러리 스웽크의 강렬한 눈빛이 담긴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2005)였습니다.
2005년 당시, 제가 참여했던 <달콤한 인생> (2005)이라는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경쟁 개봉했던 작품이라, 괜한 치기와 오기로 ‘뻔한 스포츠 영화, 나는 극장에서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당시 두 영화의 예고편을 모두 맡았던 대학 동기가 떠올랐습니다. 나름 한 작품에서 만났다는 반가움에, 우리 예고편도 잘 만들어 달라 응원하려 홍보팀에 끼어 종종 얼굴을 보곤 했는데, 그 친구는 만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밀리언 달러 베이비>만을 추앙하던 모습이었습니다.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늦게 시작된 꿈, 그리고 만남
서른이 넘은 나이에 복싱을 시작하려는 식당 종업원 매기와, 세상에 마음을 닫은 베테랑 트레이너 프랭키. 프랭키는 처음에 그녀를 거절했지만, 매기의 끈질긴 진심으로 마음을 엽니다. 두 사람은 승리를 거듭하며 혈연보다 진한 유대를 쌓아가고, 어느새 부녀에 가까운 관계가 됩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의 비극적인 사고로 매기가 전신 마비가 된 순간부터 영화는 스포츠 영화의 외피를 벗고, 삶의 끝자락에서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합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항상 자신을 보호하라(Protect yourself at all times).”
프랭키가 매기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 말입니다.
복싱의 기본 원칙인 이 문장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잔인한 은유처럼 다가옵니다. 프랭키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킨 인물입니다. 답장 없는 딸에게 편지를 보내고, 성당에서 신부에게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그의 삶에서 ‘자기 보호’란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매기의 등장은 그 원칙을 흔듭니다. 프랭키는 그녀의 가운을 챙기고, 머리를 땋아주며, 스스로 세운 보호막을 조금씩 내려놓습니다. 그가 다시 삶의 온기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운명은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그를 시험합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선택의 순간, 보호를 포기하다
사고 이후, 전신 마비가 된 매기는 프랭키에게 자신의 죽음을 부탁합니다. 이 선택 앞에서 프랭키는 평생 지켜온 신념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매기를 살려두는 것은 자신의 죄책감과 외로움을 보호하는 일이었고, 그녀를 보내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결정이었습니다. 프랭키는 결국 후자를 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모쿠슈라’, 마지막 고백
매기의 마지막 순간, 프랭키는 그녀의 귀에 속삭입니다.
모쿠슈라(Mo Cuishle)... “나의 소중한 사람, 나의 혈육.”
젊은 시절의 저는 매기의 죽음이 슬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를 떠나보낸 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프랭키의 뒷모습이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온전히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무거운 일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이렇게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인생이라는 링 위에서 필요한 것은 화려한 승리나 완벽한 방어가 아니라는 것을요. 때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가장 소중한 보호막을 내려놓고, 그로 인해 생기는 상처까지 감내하는 용기가 진정한 승리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어떨까요? 저는 아직까지도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냉소적인 질문만을 퍼붓던 젊은 신부님에게 울먹이며 질문하는 프랭키의 대사가 오래도록 귓가에 남습니다.
“이제 그 앤 죽고 싶어 하는데, 난 그 애와 함께 있고 싶어요”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