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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7.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가장 화려한 축제와 가장 쓸쓸한 현실 사이
저녁 뉴스를 보다가 묘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한 채널에서는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의 화려한 레드 카펫과 배우들의 미소를 비추고 있었고, 다른 채널에서는 노인 빈곤과 쓸쓸한 고독사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화려한 예술의 순간과 가장 낮고 어두운 삶의 풍경.
우연히 겹쳐진 두 장면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제69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본 영화가 세계 영화계 최고 영예를 안은 것이지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서류와 매뉴얼 속에서 지워지는 사람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40년 동안 성실하게 일해 온 목수입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는 국가의 복지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담당 의사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질병 수당 심사관은 기계적인 체크리스트만 들여다본 채 그에게 ‘근로 가능’ 판정을 내립니다. 몸은 망가졌는데 국가는 그를 환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계가 막막해진 다니엘이 마주한 것은 끝없는 행정 절차와 차가운 매뉴얼이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반복되는 지루한 대기음, “모든 신청은 인터넷으로만 가능하다”라는 무표정한 안내는 평생 컴퓨터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노인에게 거대한 벽처럼 다가옵니다. 편의를 위해 도입된 디지털화와 행정 효율이 정작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밀어내는 장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다니엘의 거친 손은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도움만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툴툴거리면서도 어려운 이웃의 가구를 고쳐주고, 굶주린 아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는 그런 그의 모습을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사람이 서서 바라보는 곳에 카메라를 둔다”
이 작품을 만든 켄 로치(Ken Loach, 1936~)감독은 평생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온 영국의 거장입니다. 그의 연출 철학을 설명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서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카메라를 놓는다.”
그는 인물을 영웅처럼 미화하지도, 불쌍한 희생자로 소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의 눈높이에서 현실을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니엘 블레이크를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 곁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이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복지는 왜 인간의 자존심을 시험하는가
영화가 더욱 아픈 이유는 복지 제도가 끊임없이 다니엘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질병 수당을 받지 못하자 그는 실업 수당이라도 받기 위해 억지로 구직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일할 수 없는 몸으로 이력서를 돌리고 면접을 보러 다녀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 그 과정에서 그는 노동자로 살아오며 지켜온 자부심과 존엄을 조금씩 잃어갑니다. 그리고 이 서글픈 장면은 2026년 우리의 현실과 그리 멀지 않아 보입니다.
초고령사회로 들어선 지금의 우리 역시 복잡한 복지 신청 서류와 키오스크, 온라인 예약 시스템 앞에서 헤매는 수많은 ‘다니엘 블레이크’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점점 발전하지만, 그 속도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소외와 단절이 되기도 합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황금종려상이 비춘 가장 낮은 곳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 속 절망이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 전체가 앓고 있는 보편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 차가운 현실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국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시스템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단순한 예술적 성취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세계 영화계가 응답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출처 : 칸 영화제 페이스북
“나는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다니엘은 끝내 제대로 된 판정조차 받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돈이 없어 가장 이른 시간에 치러지는 쓸쓸한 장례식. 그곳에서 다니엘에게 큰 도움을 받은 케이티는 울먹이며 다니엘이 남긴 글을 대신 읽어 내려갑니다.

이미지 출처 : 영화사 진진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도왔습니다.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