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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8. 2027년, 성큼 다가온 시간
얼마 전, 오랜 대학 동기들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밤새 영화와 철학을 이야기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제는 부모님의 건강과 자신의 건강, 그리고 대학생이 된 자녀들의 진로 걱정이 대화의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며 웃고 있던 그때, 누군가 무심코 말했습니다.
"26년도 절반이 지나갔어. 내년이면 벌써 2027년이야."
불현듯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2006).
영화 속 배경이 바로 2027년이기 때문입니다. 개봉 당시에는 한참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이제는 불과 1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습니다.

<칠드런 오브 맨> 포스터 출처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영화 속 2027년은 전쟁과 테러, 난민 문제, 극단적인 국가주의가 일상이 된 세상입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18년째 단 한 명의 아이도 태어나지 않는다는 설정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내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진 세상을 의미합니다.
영화를 다시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도 그때 영화가 그려낸 세상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구나. 높아지는 국경의 벽, 서로를 향한 혐오와 불신,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기보다 오늘을 버티는 데 지친 사람들. 그래서 이 영화는 미래를 예언했다기보다, 희망을 잃으면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아이를 잃은 남자와 세상의 마지막 아이.
주인공 테오는 오래전 어린 아들을 전염병으로 잃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세상에도, 자신에게도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난민 여성 키가 인류에서 유일하게 임신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거대한 재난 영화가 아니라, 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이야기로 바뀝니다. 총을 들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한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 말입니다.
저는 이 변화가 참 좋았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결국 한 사람을 끝까지 지켜내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씨네21
삶을 포기하라고 권하는 사회
영화 속 영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안락사를 권하는 광고를 반복해서 내보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암울한 설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 광고는 정부가 죽음을 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희망을 잃은 사회가 얼마나 쉽게 삶을 포기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키는 아이를 낳고, 테오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 그 아이를 지켜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에게는 이 두 장면이 계속대비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조용히 삶을 끝내라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가는 끝까지 생명을 지켜내려 애씁니다. 결국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작은 믿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총성이 멈춘 순간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역시 아기의 울음소리입니다. 정부군과 반정부 세력의 격렬한 총격전이 이어지던 폐허 속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총을 겨누던 병사들과 반군은 모두 움직임을 멈춥니다. 누군가는 성호를 긋고, 누군가는 조용히 길을 열어줍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서로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아기 앞에서는 다시 사람이 됩니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을 합니다. 희망은 거대한 기적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존재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라도 바꾸는 순간 찾아오는 것이라고. 숭고합니다. 몇 번을 봐도 이 장면에서는 늘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내일'이라는 이름의 배
영화의 마지막, 테오는 키와 아기를 작은 배에 태워 "Tomorrow"라는 이름의 배를 기다립니다. 국내에서는 '미래'로 번역되었지만, 저는 '내일'이라는 표현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미래'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거든요. '내일'은 오늘만 지나면 닿을 수 있는 시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테오는 결국 그 배에 오르지 못한 채, 키와 아기만이 그 '내일'을 향해 떠납니다.

출처 : 씨네21

출처 : 씨네21
내일은 누군가가 지켜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키는 고민하던 아기의 이름을 '딜런'이라고 짓습니다. 테오가 오래전 잃었던 아들의 이름입니다. 잃어버린 이름 하나가 새로운 생명에게 이어지는 순간. 마치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감독이 정말 그런 의미를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장면을 보며, 테오의 상실이 비로소 희망으로 이어지는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출처 : 씨네21
친구들과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그날 자녀들 앞날을 걱정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내년이면 영화 속 2027년이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일까요?
불안과 절망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끝까지 지켜낸 '내일'일까요.
Children of Men Official Trailer #1 →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