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㉒ 고흐의 ‘해바라기’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뮌헨의 푸른빛 속에서 피어난 노란 생명력
독일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테크'를 2011년에 방문했을 때, 수많은 거장의 작품 사이에서도 눈에 익숙하여 길을 멈추게 하는 작품이 있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열두 송이 해바라기'다. 물론 고흐의 해바라기는 작품이 한두 점도 아니고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수없이 보던 바로 그 고흐의 작품이지만 이 해바라기는 타오르는 듯한 노란 배경이 아닌 강렬하면서도 차분한 청록색 배경 속에 놓여 있다.

해바라기('열두 송이 해바라기', 1888) 출처 : wikipedia
이 작품은 1911년 독일의 공공 미술관이 최초로 구입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다. 당시 보수적이었던 독일 화단에 현대 미술의 파동을 일으켰던 이 그림은, 고흐가 프랑스 아를(Arles)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던 친구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그렸던 환영의 작품이었다. 두껍게 발린 물감의 질감, 이른바 임파스토(Impadto) 기법은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꽃잎들이 마치 꿈틀대는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고흐는 왜 '해바라기'에 집착했을까? 1888년, 그는 동료 화가들과의 공동체를 꿈꾸며 아를의 노란 집을 임대했다. 그곳에 함께 공동생활을 하러 방문할 고갱의 방을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 ‘해바라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해바라기'라고 부르는 아를에서의 연작은 총 7점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전 세계 공공 미술관에는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를 포함해 5점만 남아 있다.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출처 : pinakothek.de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는 ‘노란색 위의 노란색’이라고 불리는 가장 유명한 15송이 버전이 있으며,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은 고흐가 런던 버전을 직접 다시 그린 복제본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필라델피아 미술관'에는 뮌헨의 청록색 배경 버전을 다시 그린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나머지 작품 중 하나는 1945년 전쟁 중 일본에서 소실된 작품, 다른 하나는 미국의 무명의 개인 컬렉터가 소장하여 대중이 직접 볼 기회는 사라진 상태이다.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된 해바라기('노란색 위의 노란색', 1888) 출처 : wikipedia
복제본과 레플리카
복제본(반복작)과 레플리카라는 용어의 차이를 살펴보아야겠다. 흔히 레플리카라고 하면 타인이 베껴 그린 모작을 떠올리기 쉽지만, 미술사적으로 고흐가 직접 그린 여러 점의 '해바라기'는 모두 진품으로 간주한다. 고흐는 처음에 그린 '해바라기'를 스스로 다시 그린 반복(Repetition) 작품들을 제작했다. 고흐가 이처럼 자신의 작품을 다시 그린 이유는 단순히 성공작을 복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만족한 구도를 다시 붙들고, 색채와 붓질과 화면의 밀도를 조금씩 다르게 변주하며 같은 주제를 거듭 그렸다. 이 과정을 통해 더 정제된 색감과 붓 터치를 구현하려고 했는데, 이는 단순한 복제가 아닌 예술적 완성을 향한 고흐의 예술적 집념으로 본다.
한국인들에게 특히 흥미로운 이야기는 일본 도쿄의 '솜포(sompo) 미술관'이 소장한 '해바라기'에 얽힌 비화다. 1987년 당시 야스다 화재해상보험이 약 53억 엔이라는 세계 최고 경매 사상 최고가로 런던 크리스티에서 이 작품을 낙찰받았을 때, 세계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런던 버전과 너무나 흡사한 구도 탓에 고흐가 아닌 고갱이 그렸거나 후대의 모작일 것이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솜포미술관(Sompo Museum of Art) 출처 : gotokyo.org
이 논란은 2001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반 고흐 미술관'의 정밀 감정 결과, 이 작품에 사용된 황마(Jute) 소재가 고갱이 아를에 올 때 가져왔던 롤에서 잘려 나간 것임이 확인된 것이다. 가난했던 고흐가 캔버스가 부족해지자 고갱의 황마를 빌려 쓴 기록과 과학적 분석이 일치하면서, 이 작품은 비로소 진품으로 공인받았다. 이는 전쟁 중 소실된 '아시아의 해바라기'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극적 반전이었다.

솜포미술관에 전시된 해바라기(1889) 출처 : wikipedia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고흐의 '해바라기'가 현재는 '알테 피나코테크'에 있는 이유는 길 건너편 '노이에 피나코테크'가 대규모 리모델링 중이기 때문이다. 2019년에 시작된 이 공사는 2027년 말이나 2028년 초에 완공될 예정이라고는 하지만, 관람객들이 다시 '노이에 피나코테크'로 들어갈 수 있는 시점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덕분에 지금 뮌헨을 찾는 이들은 '알테 피나코테크' 한 곳에서 르네상스 거장들과 인상주의 거장들을 동시에 만나는 특별한 행운을 누리고 있다. 마치 루브르에서 오르세 작품들도 한 번에 관람할 수 있는 횡재랄까…?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출처 : pinakothek.de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건물 자체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전쟁 중 폭격으로 알테 피나코테크는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당시 건축가 한스 델가스트는 완벽한 원형 복원을 거부했다. 대신, 파손된 부분의 붉은 벽돌을 그대로 드러내어 수리한 흔적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이나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전쟁의 흔적을 역사로서 받아들이겠다는 철학적 결정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관람객들은 화려한 회화 작품을 감상하는 동시에, 벽면에 남은 붉은 벽돌을 통해 과거의 전쟁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알테 피나코테크에는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는데, 특히 루벤스 컬렉션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초대형 규모를 자랑한다.

인동덩굴 그늘에서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1609-10) 출처 : wikipedia
몇 가지 유용한 팁은 먼저, 알테 피나코테크는 일요일에 1유로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평일 9유로 입장료에 비해 큰 폭으로 할인되기 때문에 일정이 맞는다면 일요일 방문을 고려해 볼 만하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그렇듯 이런 정보는 모든 관광객들도 대부분 알고 있어서 현지인과 관광객이 더블로 몰려 엄청 붐빌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래도 평일 오전 시간대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거장들의 명화부터 전쟁의 흔적을 담은 붉은 벽돌, 그리고 고흐의 해바라기까지. 뮌헨이 품은 이 특별한 예술 공간은 우리에게 시각적 호사를 넘어 역사를 기억하고 예술을 느낀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되묻고 있다.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공식 홈페이지→

강두필 교수
한동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박사과정 수료했다. Paris 소재 CLAP35 Production 대표 감독(CF, Documentary)이며, 저서로는 좋은 광고의 10가지 원칙(시공아트), 아빠와 떠나는 유럽 미술여행(아트북스), 모두가 그녀를 따라 한다(다산북스),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다산북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인의 CF 감독(살림출판사) 등이 있다. 전 세계 미술관 꼼꼼하게 찾아다니기와 매일의 일상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기고 편집해 두는 것이 취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