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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31

Falling Slowly, 그날의 우리

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9. 두 죽음이 알려준 2007년 가을, 전주의 기억


이상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침에는 영화 <원스>의 주인공이자 뮤지션이었던 글렌 한사드(Glen Hansard, 1970-2026)의 사망 뉴스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작업했던 한 배우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죽음이 저에게는 하나의 기억으로 이어졌습니다.


2007년 가을, 전주의 한 영화관.

우리는 다른 몇몇의 동료들과 함께 <원스>를 보았습니다.



<원스> 포스터    출처 : namuwiki


당시 저는 전라도에서 긴 시간 동안 촬영하는 영화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는 단역 배우였습니다. 당시 서른 살의 저는 영화를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였고, 저보다 어렸던 그는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반짝이던 청년이었습니다.


촬영이 없는 날이면 삼삼오오 차를 몰고 전주로 달려가 영화를 보는 일이 고된 촬영 중간중간 소소한 즐거움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날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새벽까지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보다 그 하루가 더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원스>는 화려한 영화가 아닙니다.


더블린 거리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살아가는 한 남자와, 체코에서 건너온 이민자 여성이 우연히 만나 음악을 만들게 되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거창한 사건도 없고, 운명적인 사랑도 없습니다. 대신 함께 노래를 만들고,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사랑 이야기라기보다, 누군가의 인생을 잠시 비춰 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도 그랬고, 우리의 젊은 날도 그랬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남는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Falling Slowly, 다시 들리는 노랫말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이 노래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Falling Slowly.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첫 기타 전주만 들어도 그날의 장면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특히 저는 이 가사가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We've still got time.

"가라앉는 이 배를 집으로 돌려줘.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어."



출처 : 네이버 영화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사랑 노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다르게 들립니다. 인생이 흔들리고 길을 잃었을 때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노래처럼 들립니다. 아마 그날 영화관을 나서던 저에게도 그 노래는 그렇게 들렸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누군가는 감독을 꿈꾸고 있었고, 누군가는 배우를 꿈꾸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기타를 조금 칠 줄 알던 저는 서툰 코드로 Falling Slowly를 흉내 냈고, 친구들은 따라 불렀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삶을 이야기했고, 삶을 이야기하다가 세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날 밤은 참 뜨거웠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하루가 이렇게 갑자기 선명한 기억으로 되살아날 줄은... 오래 기억될 것만 같습니다. 그 시간을 거쳐 무엇이 되기보다 어떻게 살기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미루고 미룬 시간에 대한 미안함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의 소식도 뜸해졌습니다.


몇 년 전, 지인의 결혼식에서 만난 동생이 경기도 어디선가 작은 식당을 하고 있다며 소식을 전했습니다. 가정을 꾸린 뒤, 배우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경제적 뒷받침이 되고자 가게를 열었다고요.


'언젠가 한번 가봐야지.' 그렇게 생각만 했습니다.


결국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늘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보면 된다고. 다음에 연락하면 된다고. 하지만 어떤 '다음'은 끝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미안함이 오늘은 유난히 크게 다가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작은 영화가 선물한 하루


<원스>는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작은 영화였습니다. 카메라도 거칠고, 화면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는 우리에게 아주 큰 하루를 선물했습니다. 꿈꾸는 사람들과 밤새 웃고 노래하며 미래를 이야기했던 시간. 지금은 그 자리에 없는 사람까지도 함께 떠오르게 만드는 기억.


"영화를 다시 본 것이 아니라, 그날의 우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사랑도, 음악도, 청춘도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불렀던 노래만은 오래 남았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도 영화와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했던 시간은 끝나도, 그날의 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글렌 한사드의 노래를 다시 듣던 날, 그리고 그 동생의 부고를 들은 날, 저는 2007년 전주의 작은 영화관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아직 젊었고, 영화를 사랑했고, 미래가 조금은 두려우면서도 끝없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 동생은 이제 제 곁에 없지만, 그날 함께 보았던 영화와 함께 웃던 모습만큼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어쩌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감동뿐만 아니라 함께 본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원스>보다도, 그날 함께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Glen Hansard, Marketa Irglova - Falling Slowly (Official Video) →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