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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2

위로되지 않는 슬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10. 위로하지 말았어야 했던 순간


얼마 전 가까운 후배가 자신의 슬픔과 힘듦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별생각 없이 말했습니다.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

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처 : istockphoto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나도 다 겪어봤던 일이라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슬픔을 너무 쉽게 여겼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일처럼 보이는 순간이, 당사자에게는 오래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완벽하게 알 수 없는 그의 슬픔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위로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각본가이자 감독인 케네스 로너건(Kenneth Lonergan, 1962~)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2016)입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포토 


영화가 개봉한 2017년 초, 저 역시 어떤 위로의 말도 들리지 않던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때 이 영화를 보며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이야기


영화는 보스턴에서 아파트 관리인으로 살아가는 리 챈들러의 건조한 일상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타인과의 소통을 끊은 채 관성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뿐인 형 조가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맨체스터로 돌아갑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형의 유언장을 확인한 리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형이 자신을 열여섯 살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하지만 리에게 맨체스터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에는 평생 도망쳐온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밤, 술에 취한 채 난방을 위해 벽난로에 불을 지펴놓고 집을 나선 사이 화재가 발생했고, 어린 세 아이를 모두 잃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비극적인 사고로 판단되어 형사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리는 그날 이후 스스로에게 평생의 벌을 내리듯 살아갑니다.


그에게 시간은 상처를 치료해 주지 못했습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상처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깊게 남는 장면은 리가 전 부인 랜디와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입니다. 랜디는 과거 리를 떠나며 퍼부었던 모진 말들을 사과합니다. 그리고 리가 죽지 않고 살아주기를 바랍니다.


리는 죽지 않겠다는 대답 대신 랜디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랜디는 울면서 리를 붙잡지만, 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리를 피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을 자학합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는 흔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조카 패트릭이 자신과 함께 살 수 없는 이유를 묻자, 리는 그렇게 말합니다.


"I can't beat it." ("이겨낼 수가 없어. 미안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오히려 그 말이 이 영화의 가장 솔직한 고백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상처를 이겨내야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는 결국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 자리를 형의 친구에게 부탁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렇다고 패트릭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조카를 돌보고, 계속 만나고, 자신의 방식으로 곁에 남습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상처가 없어져야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가진 채로도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누군가를 걱정하고,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영화의 후반부, 조카 패트릭이 얼어붙은 땅을 나뭇가지로 찔러보는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얼음이 녹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출처: 네이버 영화 예고편


위로되지 않는 슬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후회가 있고,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쉽게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괜찮아지기를 바라면서도, 지금 당장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곁에 있고 싶습니다.



출처 : unsplash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슬픔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가진 채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건넸던 수많은 위로의 말들을 떠올려봅니다. 그때의 나는 위로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아무 말 없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주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슬픔도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그 슬픔을 없애기보다, 그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 예고편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