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검색
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하얀 복도 끝에서 마주한 ‘덜컥’한 공포
시나리오를 마친 뒤 찾아온 것은 해방감이 아니라 심한 몸살과 근육통이었습니다.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라 여기며 버텼지만, 어느 날 아침 갑작스럽게 가슴 통증과 어지럼증이 찾아왔고 결국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차가운 병원 복도에 앉아 생전 처음 받아보는 여러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병원 특유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문득 ‘삶이 갑작스럽게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근원적인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덜컥 겁이 나더군요.
시나리오도 쓰고 에덴미디어 원고도 쓰고 있지만, 정작 내 삶의 마지막 장은 어떤 문장으로 맺어질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막막한 순간, 얼마 전 배우 이순재 님이 에덴낙원에 모셔졌다는 소식이 떠올랐고,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포스터 출처 : namuwiki
그때는 몰랐던 이야기
2011년 2월 극장가는 설 연휴를 맞아 화려한 영화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속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북적거리는 연휴가 지난 뒤 조용히 개봉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조감독 생활을 마치고 젊은 인물들이 나오는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노인들의 이야기가 뭐 특별할까”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특별했습니다. 젊은 날의 사랑이 뜨겁게 시작되는 감정이라면, 이 영화는 서서히 끝을 향해 가는 사랑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이제 막 가까워진 친구의 마지막 편지
다시 떠올릴 때 가장 마음이 무거워지는 장면은 만석(이순재)이 군봉(송재호)의 편지를 받고 그의 집을 찾는 순간입니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을 때, 평생 아내만을 위해 살아온 군봉이 아내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내린 선택은 ‘사랑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자식들에게 숨겨달라는 부탁은 끝내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끝까지 자식들을 걱정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그 장면 앞에서, 남겨진 가족들의 자리와 역할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호상이라며 “자식 고생 안 시키고 잘 가셨다”라고 말하는 조문객들조차도요.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별이 된 네 사람을 기억하며
이제는 영화 속 네 명의 주인공 모두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송재호, 윤소정, 김수미, 그리고 이순재까지.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았던 배우들이 남긴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집니다.
별밤 하늘을 나는 오토바이
영화는 현실의 슬픔을 마지막 장면으로 위로합니다. 만석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뿐의 고향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아름다운 위로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따뜻한 상상, 고통 없는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위로일지도 모릅니다. 그 희망 때문인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만석은 미소 짓습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왜 ‘그대’였을까
다행히 병원 검사 결과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병원을 나서며 마신 차가운 밤공기는 전과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언제 삶이 멈출지 알 수 없기에,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을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떠나는 순간보다 남겨질 사람들을 더 깊이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뿐의 생일 케이크 촛불 앞에서 만석이 남긴 대사는 처음 봤을 때도, 지금 다시 떠올려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당신’이 아니라 ‘그대’라는 말. 만석이 먼저 떠나보낸 아내에게만 ‘당신’이라 불렀기에 선택한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떠나, 어쩌면 더 조심스럽고 늦게 꺼내는 말이기에 ‘그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모두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다정하지 못하더라도, 넘어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삶. 그 마음을 담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습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