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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2

12년, 한 사람의 눈빛이 깊어지는 시간 <보이후드>

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6. 12년, 한 사람의 눈빛이 깊어지는 시간 <보이후드>


익숙한 얼굴에서 발견한 생경한 세월


얼마 전, 12년 전 첫 작품을 준비할 때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가깝게 알고 지내는 지인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그의 얼굴에서 예전엔 보지 못했던 낯선 깊이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눈가의 잔주름이나 옅어진 목소리 같은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치기 어렸던 20대의 날카로운 에너지는 어느덧 세상을 조금은 너그러이 바라보는 온화함으로 바뀌어 있었고, 거침없던 말투에는 경청과 배려라는 여유가 생겨나 있더군요. 12년이라는 시간이 한 사람의 '공기' 자체를 빚어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문득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보이후드>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우연하게도 제가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것이 딱 12년 전의 일이기도 했고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12년의 인내, 그리고 실제 딸의 성장을 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긴 시간을 담아내는 데 독보적인 재주가 있는 감독입니다. 1996년부터 2013년에 걸쳐 이어진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까지, 그의 유명한 '비포 시리즈'만 보아도 알 수 있죠. 영화 <보이후드> 또한 2002년부터 2013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같은 배우들과 매년 만나 촬영을 이어간 경이로운 프로젝트입니다.



출처 : www.nonesuch.com


감독은 배우들과 일 년에 한 번 즐거운 휴가를 함께 보낸다는 마음으로 촬영해 왔다고 말합니다. 창작자로서 참으로 행복하고 부러운 작업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는 여섯 살 꼬마 '메이슨'이 열여덟 살 청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분장이나 CG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배우의 실제 생물학적 성장이 영화의 서사 그 자체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죠.


재미있는 점은 감독의 실제 딸인 로렐라이 링클레이터가 주인공 메이슨의 누나 '사만다'로 출연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춘기를 지나며 촬영을 귀찮아하던 딸이 "제발 내 캐릭터를 죽여달라"라며 감독 아빠에게 떼를 썼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하지만 감독은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그 지루하고도 찬란한 과정을 카메라에 정직하게 담기 위해, 그는 영화 기법이 아닌 '시간'을 믿기로 했던 것입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어떤 영화는 평가되지 않는다. 뒤돌아보니 나의 모든 순간도 영화였다. 삶은, 그렇게 영화가 된다." — 어느 영화 평론가의 이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잖아, '순간을 잡아라(Seize the moment)'라고. 난 그 반대인 것 같아. 순간이 우리를 잡는 거지."


영화 후반부, 대학생이 된 메이슨은 친구와 석양을 바라보며 우리가 흔히 아는 "Seize the day(오늘을 잡아라, 카르페 디엠)"에 대해 아주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늘 시간을 통제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움켜쥐어 무언가 대단한 성취를 이뤄내야 한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영화 속 메이슨의 삶을 보면, 정작 그를 만든 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이혼, 서툰 첫사랑, 사소한 대화들... 우리가 의도적으로 잡으려 애쓰지 않았던 그 무수한 평범한 순간들이 결국 우리를 붙잡고 흘러가며 지금의 우리를 완성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12년 전 만났던 그 지인의 눈빛이 깊어진 이유도, 그가 특별한 날들을 잡으려 애써서가 아니라, 그저 12년이라는 수많은 순간에 성실히 붙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정적 사건이 없어도, 삶은 흐른다


작가로서 시나리오를 쓸 때 저는 늘 '결정적 사건'에 집착하곤 합니다. 하지만 <보이후드>는 다릅니다. 삶은 거대한 반전이나 클라이맥스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먹는 아침 식사와 의미 없는 농담, 창밖을 내다보는 멍한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죠. 여섯 살 메이슨이 열여덟 살이 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12년간 알고 지낸 누군가의 변화를 한 편의 파노라마로 지켜보는 것과 같은 벅찬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시간의 정직함'을 일깨워 주죠.



출처 : 네이버 영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몰아칩니다. 그건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을 잡아야 한다"라는 강박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대신 나를 붙잡고 지나가는 이 사소한 순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합니다. 훗날 제 눈빛에서 "참 좋은 세월을 통과해 왔구나"라고 누군가가 느껴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인생이라는 긴 필름 위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보이후드>를 찍고 있는 주연 배우들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불안이 당신을 흔들 때, 이 영화가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보이후드> OST "Family of the Year - Hero" [Official Music Video] →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