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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2026-04-02

폭풍을 지나,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스라엘에서 배운 지혜의 유산


세 번째 폭풍 앞에서 - 백년의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렌이 울립니다. 새벽이지만 이스라엘의 노인들은 익숙한 듯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무릎이 시큰하고 새벽이라 눈이 어둡지만 서두르지 않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슬리퍼를 신고, 복도를 따라 대피소로 향합니다. 집에 방공호가 있는 집은 방공호 방으로 대피하고, 없는 집들은 집 밖으로 나가 대피소로 움직입니다. 특별히 가져가는 물품은 없습니다. 하지만 손에는 낡은 사진이 들려있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의 자신,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의 사진과 같은 것들입니다.


출처 : unsplash


이분들에게 사이렌 소리가 익숙하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길었다는 뜻입니다. 폴란드, 헝가리, 독일 및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스라엘로 온 노년 세대는 어린 나이에 게토를 경험하고,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폭풍이었습니다.


수십 년이 흘러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이 두 번째 폭풍으로 이들을 덮쳤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과 충돌은, 이들에게 또 하나의 ‘지속되는 폭풍’으로 경험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의 폭풍을 모두 살아낸 사람들이, 오늘 밤 또 대피소 바닥에 앉아 하늘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처 : wikipedia


2026년 현재, 이스라엘에는 대략 111,000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88세입니다. 그중 400여 명은 이미 100세를 넘겼습니다.


이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방식으로 자행된 학살에서 살아남았고,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온몸으로 통과했으며, 2023년 10월 7일의 충격을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불안정한 안보 상황 속에서 일상의 위협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들을 걱정했습니다. 당연한 걱정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 트라우마가 깊을수록 10월 7일 이후 불안과 우울 수치가 높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총소리, 사이렌, 납치라는 단어들이 80년 전의 기억을 깨운 것입니다. 잠들었던 악몽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떤 노인은 손자에게 "이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냐"라고 물었고, 어떤 노인은 밤새 창문을 열어두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unsplash


하지만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은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바로 희망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존자들의 희망 수치, 공동체 참여도, 회복력 — 이 항목들에서 생존자들은 다른 이스라엘 노인들과 통계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너지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너무나 큰 경험을 했던 터라 무너지지 않는 법을 몸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출처 : unsplash


텔아비브 북쪽의 한 노인 복지관에는 매주 화요일 미술 수업이 열립니다. 참가자 대부분이 80대 노인들입니다. 그곳에서 그림을 가르치던 40대 자원봉사 청년이 있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수업 후 함께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가자 전선에서 전사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지금도 매주 화요일마다 느낀다고, 복지관 관계자는 전합니다.


그럼에도 수업은 계속됩니다. 붓을 드는 손이 조금 떨려도,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립니다. 사과도 그리고, 꽃도 그리고, 때로는 기억 속의 풍경도 그립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치료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이 붓질 하나하나가 ‘지금도 살아 있다’는 조용한 선언일 지도 모릅니다.



텔아비브 전경    출처 : unsplash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가운데 100세 이상 노인이 400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연구자들에게 오래된 수수께끼였습니다.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습관이 되어 장수로 이어진다는 설명도 있고, 극한의 경험이 특정 심리적 면역 기제를 강화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이들을 만나는 사회복지사들은 조금 다른 말을 합니다.

"이분들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법을 알아요. 내일을 너무 멀리 내다보지 않아요. 오늘 밥이 맛있으면 맛있다고 말하고, 오늘 햇볕이 따뜻하면 따뜻하다고 말하죠. 그게 비결인 것 같아요."


이스라엘의 노인 복지 현장에서 오래 일한 간호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엔 우리가 이분들을 돌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래 일하다 보니, 어떤 날은 이분들이 저를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약해 보이는 삶이 실은 더 단단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발견입니다. 폭풍을 거듭 견뎌온 삶은 단순히 시간이 쌓이는 일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조용히 단단해지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통곡의 벽 전경    출처 : wikimedia By Yourway-to-israel - 자작, CC BY-SA 3.0


전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에서 노년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한국에서의 노년은 종종 '마무리'의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조용히 쉬어가는 시간으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이 세기를 가로지르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노인들에게 노년은 마무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 중인 삶입니다. 폭풍이 와도 또 살아야 하고, 손자가 전선에 나가도 아침밥을 차려야 하고, 사이렌이 울려도 창가의 화분에 물을 줘야 하는 삶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강한 형태의 삶이 아닐까요. 무너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아니라,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너무 많이 반복해서 그게 그냥 삶의 리듬이 된 사람들. 슬픔을 모르는 게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사는 법을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오늘 밤 다시 대피소로 들어가고, 내일 아침 다시 삶으로 돌아옵니다.


레아 골드버그(Leah Goldberg, 1911-1970)    출처 namuwiki


이스라엘의 시인 레아 골드버그(1911~1970)는 1943년,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던 그해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로 그런 날이 다시 올까,

용서와 은총으로 가득 찬 날이,

그리하여 들판을 걷게 될까,

아무런 죄 없는 자처럼?

- 레아 골드버그, ‘정말로(Ha’omnam)’, 1943


80년이 지난 지금, 그 시를 처음 읽었을 세대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같은 질문을 품고, 오늘 하루를 살아냅니다.

그 질문이 남아 있는 한, 삶도 남아 있습니다.

이범수 지역전문가

20여 년 동안 이스라엘에 거주하며 이스라엘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성서학과를 졸업하고 Bar ilan University에서 이스라엘 학을 전공하였다. 주이 한국 대사관과 팔레스타인 대표사무소에 근무하며 지역 전반에 걸친 현안들을 경험하였고 현재 이스라엘 성서, 역사, 지리, 문화, 언어, 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와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