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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8

주변부로 다시 읽어낸 어떤 역사에 대하여-영화 <퍼스트카우> (2021)



영화를 보다 보면 이야기 뿐 아니라, 매력적인 구성이나 기법이 눈에 띌 때가 있다. 전하고 싶은 바를 이런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 반하기도 한다. 21년 마지막 작품은 사회의 주변부를 조명해 평범하면서도 놀랍도록 아름다운 인간의 삶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의 <퍼스트카우>는 별다른 고민 없이 순차적으로 극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막연한 생경함을 선사하는 영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이 새롭고도 이질적인 느낌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익숙하고도 먼, 낯선 친밀감 같은 것들. 극적 반전이나 실험적인 서사와는 결이 다른 차원의 이 생경함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영화 <퍼스트카우>는 흔히 알고 있는 서부 영화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분위기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출처:네이버 영화


영화속으로

때는 신대륙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던 1800년대 초 미국 서부개척 시기. 사냥꾼 무리와 함께 이동 중인 쿠키(존 마가로)는 그들의 식사를 담당하며 함께 지내고 있다. 사냥꾼들이 활동하는 동안 그는 숲속에서 식자재를 채취해 음식을 만들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고 있지만 척박함과 야만성이 도사린 이 곳에서 그는 사냥꾼들에게 철저히 무시된다. 식자재를 구하러 간 어느 날, 쿠키는 러시아인들에게 쫓기고 있는 중국인 킹 루(오리온 리)를 만나게 되고 사냥꾼들 몰래 그에게 옷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이후 한참의 시간이 지나 쿠키와 킹은 우연찮게 조우하게 되는데 이번엔 쿠키가 킹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우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일을 기획하기 좋아하는 킹과 실질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쿠키. 둘은 빵을 만들어 팔며 그 지역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마침 마을의 유명인사인 팩터 대령(토비 존스)이 소문을 듣고 이들을 찾아오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이 만든 빵이 실은 대령이 키우던 암소의 젖을 몰래 훔쳐와 만든 빵이라는 것. 이로 인해 탄탄대로였던 이들의 사업은 조금씩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작품 곳곳에는 당연히 옳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장치들이 숨어 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옛날 옛적 우리가 알던 서부는

다정하고 꼼꼼한, 그리고 각자 소박한 꿈을 꾸며 행복해하는 두 남성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봐 왔던 서부극은 분명 이런 톤이 아닌데.......’ <퍼스트 카우> 뿐만이 아니다.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이 연출한 최근 넷플릭스 개봉작 <파워 오브 도그> 역시 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실상 서부극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희뿌연 모래먼지 속 담배를 입에 문 고독한 보안관의 얼굴이다. 아파치의 공격에 맞서던 그의 곁에는 데킬라 그리고 여닫이문이 삐걱거리는 황야의 술집이 있다. 뒤를 돌아 셋에 쏘는 총에 누가 먼저 쓰러지느냐가 대막을 장식하는 거친 이들의 세계에는 도움을 청하는 어린이와 여성의 목소리가 있고, 악당을 처단한 뒤 뉘엿뉘엿 지는 서부의 노을 사이로 사라지는 영웅의 뒷모습이 있다. 영웅과 악당이 구분 안 될 정도로 잔인하며 냉혹한 남성들의 서사. 이런 영화사적인 접근을 고려해보더라도 서부극은 철저하게 이기고 지는, 백인과 백인이 아닌 이들의 대립, 고상함과 천박함 혹은 영웅주의 서사로 점철된 장르임이 틀림없다. 선량한 백인집단과 이들을 몰아내려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대표되는 외부인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악당으로 치부되는 원주민들은 정말 외부인인가? 오래도록 이 땅에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이들이 오히려 서부극에서 철저하게 외부인 혹은 주변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여성 또한 서부극에서 남성영웅서사를 위한 주변인으로 뭉뚱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동부에서 온 백인의 귀부인들과 달리 피부가 그을린 서부 여성들은 대부분 매춘부나 유혹적으로 술을 파는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시 서구세계가 가지고 있던 우월함이라는 근거없는 자부심은 한때 ‘드림머신’이라 불리던 영화산업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특히 새로운 미지의 땅에서 획득 할 ‘부’의 꿈에 부풀어 있던 이들의 욕망은 서부를 ‘승리한 백인 영웅들의 세계’로 인식시키는데 큰 힘을 보탰다. 현재 서부극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지만 서부극을 그리워하는 감독들(대표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에 의해 더 잔인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야말로 '주변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 <퍼스트카우> 출처:네이버 영화


큰 궤적의 내부에 존재하는 작고 작은 역사들

그런데 <퍼스트 카우>는 위와 같은 서부 장르의 공식을 정확히 비껴나간다. 이것은 우회 했다기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복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총잡이들의 날선 결투와 승부, 영웅주의 서사와 백인우월로 물든 서부극의 원형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바느질을 하거나 숙소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유태인 남자와 중국인 이민자 둘 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서로 기 싸움을 할 여유도 없이 몰래 암소젖을 훔쳐서 파는 절박하고 간절한 이들이 서부극 한복판에 등장한다. 이들을 둘러 싼 서부는 황량한 모래먼지 대신 태고적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 가득하고 이들이 벌이는 약탈의 현장에는 총과 피가 난무했던 서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방금 짠 신선한 암소 젖을 담은 소박한 양동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서부를 생각해 온 것일까. <퍼스트 카우>는 그 시기 그 자리에 치열하게 삶을 이어가던 보이지 않던 이들의 모습을 견인한다. 영웅주의 서사에 밀려 기록되지 않았던 사람들, 전쟁과 폭력에 밀려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진심이었을 역사의 기록으로 말이다. 극 중 킹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역사가 시작되는 이 곳에서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이는 당시 그 땅에 처음 도착한 암소 한 마리에서 출발된 수많은 이야기의 파생 속에 그들 역시 최초의 역사를 만들어 낸 그 현장에 있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이를 염두한 듯 감독은 이들의 디테일한 삶의 내면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4:3 화면을 이용하는데 이는 더 많이 보기위해 점점 좌우로 넓어지는 스크린, 더 많은 이미지를 소유하기 급급한 영화적 욕망을 보란 듯이 가볍게 비틀어버리는 여유를 보여준다.



수많은 변화 속에도 끝내 변치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적잖은 의미를 준다. 출처:네이버 영화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퍼스트 카우>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영화는 이제 막 무언가를 시작하는 미지의 땅에 들어온 소 한 마리로 인해 회전하기 시작하는 시장경제 원형 또한 담고 있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선택한 ‘도둑질’이라는 초기자본 획득방식, 혹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생계유지 방식은 역설적으로 시장의 회전을 촉진시키고 그에 따른 비극적인 결말 또한 그들을 향해 되돌아오게 한다. 이 그림은 2021년 지금도 도처에서 비슷하게 반복되는 서글픈 풍경이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의 문구로 시작한 <퍼스트 카우>는 약육강식의 지배원리가 모든 것을 움켜쥔 세상에 주변부로 불리던 이들이 삶을 추동할 수 있었던 반짝이는 의미들을 떠올리게 한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

우정이란 이름으로 서로의 역사를 완성한 두 남자. 영화는 그 시작점에서 역사 속 여전히, 항상, 지금도 존재하는 이들의 백골을 눈부신 아름다움을 머금은 한 줄기 빛으로 따사롭게 감싸 안는다.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