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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0-10-19

과거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꿈과 열정, 괜찮지 않다, <어디갔어, 버나뎃>



<비포 선라이즈>로 유명한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신작 <어디갔어, 버나뎃>을 통해 실패와 이로 인한 불안이라는 심리를 무겁지 않게, 하지만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에게 잠시 잊고 있던 꿈과 열정을 되새기게 만든다.



지난 주말,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데 친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한창 기름 요리를 하고 있는 데다가 어차피 공식적 쉼이 있는 토요일 수다나 떨자고 전화한 것 같아 일단 받지 않는 것으로 했다. 그렇게 전화는 두어 번 오다가 끊기는 듯 하더니, 잠시 후 휴대폰 액정 너머로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은주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대.”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기름 연기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복잡한 심경을 가까스로 누르고 급하게 손을 씻었다. 그래, 너 살아있긴 했구나. 문자를 확인해 보니 은주는 몇 년 동안 극심한 우울과 공황으로 치료를 받다가 그 증세가 심해져 결국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은주(실명은 아니다)는 누구보다 명민했던, 끼와 재치로 반짝반짝 빛나던 친구다. 내가 알던 사람 중 유일하게 미래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가슴 벅차오르게 만드는 섬세한 글을 썼고, 그녀가 그럴 때마다 나는 손에 닿지 않는 동경을 느끼다가도 이내 격한 슬픔에 빠지곤 했다. 내가 미치도록 열심히 한다 한들, 그 감수성과 센스는 결코 따라갈 수 없겠지. 부족한 내 재능을 탓하는 숱한 날을 보냈다. 그러기에, 어린 나이에 등단하고 결혼 후 몇 권의 책으로 적잖게 인기를 누리던 그녀의 입원 소식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 자세한 이유는 모르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은주가 쌍둥이를 출산한 이후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육아로 인한 우울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한 친구는 은주가 일부러 친구들을 피한다는 둥, 가끔 답하는 문자도 뭔가 느낌이 쌔 했다는 둥 은주를 둘러싼 진실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 날 밤 도통 잠을 잘 수 없었다.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결혼/육아와 맞서야 하는 경력 단절의 위기와 ‘누군가의 엄마 혹은 아내의 이름으로 살게 되는 이들이 꿈꿔왔던 젊은 날의 이상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를 생각하며 한참을 뒤척였다. 쌍둥이 아들의 돌 사진을 여전히 대표 사진으로 걸어놓은 채 어느 시점에 멈춰버린 것 같은 은주의 SNS를 부유하다가 새벽녘 무렵 겨우 잠이 들었다.



<어디갔어, 버나뎃> 포스터

소재만 보았을 때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무거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한때 실력을 인정받는 건축가였던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본의 아니게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는 실수를 하게 된 후 스스로 건축계를 떠나게 된다. 이후 결혼, 임신과 출산을 거쳐 딸 비(엠마 넬슨)를 키우는 일에만 집중하며 하루하루 보내지만, 세상과는 보이지 않는 벽을 쌓으며 점점 마음 문을 닫아버린다. 가족 외에는 누구와도 온전히 소통할 수 없다 보니 이웃과의 관계는 이미 어색해진 지 오래다. 버나뎃의 예민한 행동과 반응으로 인해 다른 학부모들과 소소한 오해가 끊이지 않던 어느 날, 버나뎃이 국제 범죄와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다급한 FBI의 조사가 시작되자 그녀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장래가 촉망되던 건축가 버나뎃은 한 순간의 실수로 건축계를 떠난다

영화는 <뉴욕타임스> 84주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마리아 셈플의 장편소설 <어디갔어, 버나뎃>을 그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편지 형식인 것에 반해 이를 영화적 서사로 풀어놓은 감독의 재치가 유독 눈에 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에겐 이미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같은 ‘비포 시리즈’로 유명한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이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일명 워키토키 영화*로 불리는 작품을 다수 연출하며 인물들의 유려한 대사 활용이 돋보이는 연출력으로 인정받는 바 있다. 또한 <스쿨 오브 락>, <에브리바디 원츠 썸!!> 같은 코미디 연출에도 익숙한 감독이기에 이번 <어디갔어, 버나뎃> 역시 적절하게 활용한 유머와 위트로 ‘불안장애를 가진 주부의 실종’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조금은 부담 없이 관람 할 수 있게 한다. 

*인물들이 끊임없이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형식의 영화

영화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무겁지 않되 진지하게 다룬다

버나뎃은 일종의 사회불안 장애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다. 이는 영화가 처음 시작되면서부터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지점이다. 지금 버나뎃은 딸 비가 제안한 남극여행으로 인해 극심한 정서적 불안에 시달리는 중이다.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지만 남극 여행에 필요한 물품, 남극까지의 교통수단 등 지금 버나뎃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은 그녀를 둘러싼 안티테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버나뎃의 불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학자들 사이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감정 사회학을 빌어 보자면, 불안과 공포 혹은 인간이 지닌 다양한 감정을 단순히 개인의 역사로만 볼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는 그 감정을 자아내도록 하는 사회적 배경에 주목해야 할 필요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자주 발생하는 대표적인 감정이 바로 ‘불안’이다. 각각의 사회 구성원에게 불안이라는 감정을 유도함으로써 나와는 다른 것 혹은 타인이 내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견고한 경계를 만들게 한 뒤, 그 위로 권력과 사회적 계급을 존재하게 하는 현대사회의 작동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볼 때 사회가 버나뎃에게 부여한 이 ‘불안’이란 이름은 과거 크게 실패한 적 있는 그녀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 실패를 낙오로 규정하고 영원한 패배로 몰아가는 무한 경쟁시스템 속에서 아마 버나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게 잠식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딸 비는 엄마에게 남극여행을 제안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희망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불안 너머 여전히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꿈과 용기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장애의 버나뎃에서 다시 꿈을 찾는 버나뎃으로 바뀌게 되는 극적인 부분은 FBI의 조사 이후의 시점부터이다. 단 한 번도 가족을 떠난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버나뎃은 어떻게 그 불안과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 남극으로 간 것일까.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이다. ‘어디갔어, 버나뎃’. 이 말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버나뎃을 이르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잊고 살았던 ‘진정한 자아로서의 버나뎃은 과연 어디 있는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 물음에 대한 용기 있는 대답으로써 버나뎃은 지금 홀로 남극에 있다.


홀로 남극으로 여행을 떠난 버나뎃. 영화는 잊고 있던 자아를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때 칭송받는 건축가, 모성에 집착하던 엄마의 모습을 뛰어넘어 가슴 깊은 곳에 품어 둔 꿈을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았던 삶에서 뛰쳐나온 버나뎃은 지금 세상의 끝에 있다. 하지만 그 끝은 다시 꿈과 열정을 쏟아내는 장소다.



불안 사회 속,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은주의 소식은 그 후 아직까지는 전해 들은 것이 없다. 내가 섣불리 다가갈 수 없기에 안타까운 마음은 더더욱 커진다. 하지만 찬란했던 그 시절, 같은 꿈을 꾸었던 그 시절에 우리가 나누었던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대해 은주가 잠시라도 떠올렸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오늘도 기도한다. 코로나 시대에 놓인 어제와 오늘, 우울의 시대를 겪는 당신에게도 내일의 어느 지점에서 만날 희망과 용기의 안부를 건네고 싶다.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