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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0-09-12

자연의 생기를 담은 뉴미디어 아트,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Souls>전



리안갤러리 서울과 리만머핀 서울에서 LA 출신의 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Jennifer Steinkamp의 전시가 동시에 개막했다. 10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창작자의 손끝에서 피어난 색다른 자연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덧 가을이다. 푸르름이 지고 농익은 낙엽이 서서히 우리를 맞이한다. 올해는 지나간 계절을 만끽하지 못해 유독 아쉬움이 크지만 팬데믹의 시간 사이에서도 새로운 계절은 눈앞에 찾아왔고, 새 옷을 곱게 갈아입은 그 계절을 우리는 온전한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즐거움.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 중 하나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부는 이 계절,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영상 미학과 함께라면 그 즐거움을 더욱 배가 된다.


제니퍼 스타인캠프는 58년생, 개띠. 올해로 63세다. 창작의 길이 힘들어 잠시 한 자리에 머문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중견 작가다. 하지만 작가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3D 애니메이션 분야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주로 뉴미디어를 이용한 대규모 장소 특정적 영상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공간과 지각, 움직임이 주요 테마. 이스탄불 비엔날레, 카이로 국제 비엔날레, 미국 휴스턴 미술관,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 스페인 말라가 현대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과 비엔날레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녀는 현재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디자인 미디어아트학과 교수로 일하며 후학도 양성 중이다.


Blind Eye 4(2019). 미국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에 위치한 클라크 아트 인스티튜트 주변의 자연환경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그래픽 영상 작품이다. 이곳은 2018년 작가의 주요 개인전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제니퍼 스타인캠프 영상 미학의 특징은 공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발산하는 하모니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는 데에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관람객이 이미 작품 안에 흠뻑 몰입했다는 뜻이다. 제니퍼 스타인캠프가 추구하는 영상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 대형 미술관의 블록버스터급 전시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몰입형 영상, 체험형 작품의 감동을 작고 아담한 갤러리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변화하는 나무와 꽃, 하늘, 시공간과 그 밖의 유기적인 형태들을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작가는 빛으로 반사되는 자연의 색과 움직임을 고품질의 3D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완벽히 구현해낸다. 그것도 63세의 나이에 말이다. “우리가 자연에서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의 능력에 매료되었다”라고 고백하는 제니퍼 스타인캠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Judy Crook 12(2019)

Judy Crook 14(2019). 사계절의 변화를 담은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생동감 넘치는 나무가 이리저리 소용돌이치며 열매를 맺고 잎을 떨어뜨리는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도 박찬경, 임흥순, 임민욱, 정연두 등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영상 미디어 작가들이 많지만 대부분 1960년대, 그것도 1960년대 끝자락 세대다. 더구나 그들의 작품은 분단, 냉전, 민간신앙, 가족, 동아시아의 근대성 등 스토리 중심적이며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제니퍼 스타인캠프와 굳이 비슷한 연배를 찾자면 1957년생인 김수자 작가를 들 수 있는데 보따리를 활용해 성적 성체성, 소통과 단절 등을 다룬다는 면에서 자연을 소재로 생명의 움직임과 에너지, 생의 환희를 이야기하는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작품과는 결이 매우 다르다.


리만머핀 서울에 설치된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작품

그녀는 기존 화파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지만 그 형식을 깨고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래서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작품에서는 신인 작가의 패기 못지않은 색다른 시도, 형식의 파괴, 그로 인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

Still-Life 4(2020). 17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바니타스 정물화에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전통적인 정물화를 21세기 디지털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삶의 허무, 인생무상이라는 바니타스 정물의 형식을 깨고 긍정적인 에너지와 생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리안갤러리가 선보인 제니퍼 스타인 캠프의 Still-Life 4 © Shi-Woo Lee

사실 제니퍼 스타인캠프는 리만머핀 소속이지만, 그녀를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은 리안갤러리인데 이 때문에 이례적으로 한 작가의 전시가 두 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리게 됐다. 2010년과 2014년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그녀의 이름을 국내 무대에 알린 리안갤러리 안혜령 대표는 수많은 아트 컬렉션 중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작품에 유독 애정을 표한다.

“갤러리 VIP 파티를 열 때나 프라이빗한 모임을 가질 때 제니퍼의 작품을 실내 공간 한쪽 벽면에 틀어놓으면 게스트들이 정말 좋아해요. 스타인캠프의 생동감 넘치는 영상 안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색다른 경험을 얻는 것 같아요. 특히 가든파티를 할 때 건물 외벽에 프로젝션을 틀기도 하는데 분위기가 환상적이죠.”



Primordial, 1(2020). 인간과 자연의 공생과 함께 태곳적 이상향을 묘사한 애니메이션이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Daisy Chain Twist, tall(2004). 부드러운 바람에 간드러지듯 움직이는 꽃들이 엮인 화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소위 밀레니얼 세대는 현대미술 영상작품의 요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반복과 느림, 명상적 언어에 열광한다. 하지만 그 안에 생동감과 몰입감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미학이 되기 어렵다. 계절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무의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관람객에게 마치 그 시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감흥을 주는 제니퍼 스타인캠프. 작은 생물과 식물의 충돌, 데이지꽃이 만든 장막의 흔들림, 과일과 꽃, 식물들이 서로 우아하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동선, 비처럼 흩날리는 자작나무 잎사귀의 선율….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작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가을의 ‘풍성한 생명력’과 ‘생명의 축복’을 발견하게 된다.

리안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는 비디오 설치 작품 ‘Retinal 1 (2018), Retinal 2(2019)’ © Shi-Woo Lee

이미지 제공 리안갤러리 서울, 리만머핀 서울


김이신 <아트 나우>편집장

<아트 나우>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