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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을 따라 걷는 길 – 삼성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전시회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길을 연 화가, 겸재 정선.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인왕제색도, 그리고 조선의 산천을 화폭에 담은 수많은 걸작들로 기억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전시장을 들어선 순간, 책 속에 머물고 머릿속 한켠에 자리하던 정선은 눈 앞에 숨쉬는 화가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며, 붓을 들어 삶의 모든 결을 그려낸 예술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을 걷는 내내, 관람객 모두는 그의 시간과 숨결을 함께 마주했습니다.
전시 소개
이번 전시는 삼성 호암미술관이 기획한 겸재 정선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1층과 2층 두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각각 '1부: 금강산을 그리다', '2부: 조선의 풍경을 그리다'라는 주제로 나뉘어 전시되었습니다. 호암미술관을 비롯해 간송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 18개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대표적인 진경산수화, 관념산수화, 화조영모화 등 총 165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정선의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해악전신첩 중 [금강내산], 1747년
이번 전시는 그야말로 정선의 회화세계 전모를 주요 작품을 통해 보여주며 정선의 대표작인 금강산 그림부터 서울 한강 일대의 풍경, 고사인물화, 노송과 노백처럼 상징적인 그림까지 80세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전 생애가 촘촘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금강산을 그리다
1층에 전시된 1부는 겸재 정선이 평생 네 차례 유람하며 그렸던 금강산을 주제로 한 진경산수화로 꾸려졌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강전도]는 물론, 해금강, 장안사, 만폭동, 삼일포 등 금강산의 각 명소들이 다양한 구도와 시점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금강산 관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백천교]
이 그림들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마치 보는 이의 몸과 마음을 그 풍경 안으로 데려가는 듯한 몰입감을 줍니다. 가마를 타고 금강산을 유람한 양반들이 나귀로 갈아타고 돌아가는 환승구 였다는 [백천교]를 보면 그래서인지 갓을 쓴 양반, 가마꾼 스님, 나귀를 몰고 온 하인들과 함께 폭포 소리가 들리고, 구름이 흘러가며, 짙은 소나무 향이 코끝을 맴도는 듯합니다. 개미만큼 작은 인물들이 마치 내가 된 듯한 느낌, 웅장한 산세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감각을 전해주었습니다.
1740년대 가을철 내금강산을 그린 [풍악내산총람도]
또한, 수많은 금강산 풍경들과 함께 병풍처럼 붙어 있는 정선의 글귀들은 마치 오늘 이곳을 다녀왔다는 인스타그램의 피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경치에 시를 얹는 그 표현 방식은 시대를 넘어 감상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아주 작게 표현되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살아있는 정선의 그림 속 인물들
작은 인물들은 모두 표정과 동작이 살아 있어서, 자연스레 관람자의 시선을 가까이 끌어당깁니다. 마치 독일제 로트링의 가장 얇은 펜으로 그린 듯, 극도로 정교하고 미세한 붓선으로 묘사된 인물들은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선의 풍경을 그리다
2층의 전시는 금강산 외 정선의 다양한 진경산수화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한강변의 풍경을 담은 <경교명승첩> 속 노들섬, 양화진, 한강변 소나무 아래 앉은 시인과 화가의 모습은 그 시절 조선의 일상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경교명승첩에 실린 [미호]
서울 근교의 풍경을 담은 <미호>라는 그림은 현재의 양평 근처를 배경으로, 초록빛 산과 나무, 6월의 신록이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진한 초록 내음과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정선의 자연에 대한 감각과 표현력을 다시금 실감하게 합니다.
또한 정선은 그림 속 인물들을 매우 작게 그려 넣는데,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여,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노송, 노백, 사직송과 같은 작품들에서는 묵직하고 절제된 붓의 힘이 느껴지고, 붓의 농담과 번짐은 자연의 숨결을 직접 옮겨 놓은 듯합니다.
2부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던 곳 중 하나는 현재의 압구정을 그린 그림 앞이었습니다. 금강산처럼 가볼 수 없는 곳이 아닌 익숙한 장소이기에 그림이 더 신기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 "이 자리가 바로 지금 현재, 구현대 아파트 11동 자리"라고 알려주자 모두 웃으며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백 년 전의 풍경이 오늘의 지명과 만날 때, 전시는 비로소 시간 여행이 됩니다. 전시 내내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유럽의 어느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 못지 않은 우리가 사는 땅, 우리의 조상, 우리의 자연이 담긴 이 그림들이 주는 감동은 그 자체로 가슴 벅찬 경험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익숙한 그림
1000원 지폐 속의 겸재
흥미로운 사실 하나. 알고 계신 분도 많으시겠지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1000원 지폐 뒤에 그려진 그림, 바로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입니다. 역대 고미술 경매 역사상 최고가인 34억에 낙찰된 그림입니다.
계속 되는 감동
정선의 그림 속에는 성리학이 말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겸손과 절제의 미덕이 스며 있었습니다. 그것은 빠르게 흐르는 오늘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삼성 호암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곧 종료되지만 겸재 정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간송미술관에서는 정선의 또 다른 대규모 전시가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호암미술관에서의 감동을 잇고 싶으신 분들은 간송의 전시도 꼭 기대해보시길 바랍니다.
정선이라는 이름 속에는 자연을 향한 애정, 사람을 품은 시선, 그리고 고요하고도 단단한 삶의 태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작품 속 개미 만큼 작은 사람들,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어 멋진 풍경 속 그림을 천천히 걷다 보면, 겸재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굿 메신져
에덴가족에게 도움과 기쁨이 되는 소식을 전하는 매 순간 보람을 느낍니다. 행복을 전하는 굿 메신저입니다. 에덴낙원 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펼쳐지는 전시회와 숨겨진 이야기들, 아름다운 에덴의 모습 그리고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익한 정보들을 모아 소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