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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2

그곳에 가면 #2 우중 산책



때 이른 더위, 쉬이 끝나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지치기에 십상인 요즘이다. 여기에 곧 시작될 장마가 몸과 마음을 갉아먹지나 않을까 지레 움츠러든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도 있지 않나? 이달에는 초여름의 자연을 한껏 느낄 수 있는 푸른 내음 가득한 곳, 우산을 받쳐 들고 걷기에 좋은 곳들을 소환해본다. 설령 당장 이곳을 찾지 못하더라도 생각만으로 마음이 풍성해지고 일상에 건강함을 더해줄 것이다.



자연의 선물, ‘수·풍·석 박물관’

물(水), 바람(風), 돌(石). 제주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자연 산물이다. 재일 교포 건축가 고(故) 이타미 준은 이 소재를 테마로 세 곳의 박물관을 설계했다. 박물관이라 이름 지었지만, 사실 이곳들은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다. 제주의 자연을 체험하는 사색의 공간인 것. 자연이야말로 신이 빚은 최고의 예술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수(水) 박물관’ ⓒbiotopia


‘수(水) 박물관’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루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에 반사된 하늘과 빛, 구름의 변화를 담은 곳이다. 지붕이 없는 원형의 천창을 통해 빛이 쏟아진다. 직사각형 연못 위로 하늘과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불면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시간마다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변화도 감각을 집중하게 만든다. 비가 오면 떨어지는 빗소리까지 마치 자연 속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는 듯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면세계로의 여행에 빠질 수 있는 곳이다.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에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 ‘수(水) 박물관’ ⓒ영화사 진진


‘풍(風) 박물관’에서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얼핏 수풀 우거진 들에 덩그러니 세워진 창고 같지만, 귀를 기울이면 비로소 이곳의 진가가 나타난다. 이타미 준은 소나무를 켜켜이 배열해 마감한 나무판자 벽 사이로 온종일 바람이 드나들며 소리가 나도록 했다. 햇빛 역시 이 벽 사이를 오가며 시시각각 다른 모양새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자연과 온전히 하나 되는 시간을 선사하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의 ‘풍 박물관’에서는 바람과 비의 운치 있는 합창을 들을 수 있다.




‘풍(風) 박물관’ ⓒbiotopia


‘석(石) 박물관’은 직사각형 어두운 공간 안에서 한 줄기 빛이 일으키는 변화를 볼 수 있다. 돌로 만든 손 모양의 조형물과 멀리 보이는 산방산을 빗대 보면서 자연과 공간,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쉼을 선사한다. 천장의 틈으로 내리쬐는 빛을 계산해 바닥과 벽에 펼쳐지는 다양한 시간 그림자가 연출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 이번 편의 제목을 ‘우중 산책’이라 이름 지었지만, 사실 세 박물관은 계절이나 날씨와 관계없이 언제 와도 좋은 공간이다.




‘석(石) 박물관’ ⓒbiotopia


참고로 수풍석 박물관은 휴양형 전원주택단지 ‘비오토피아’ 내부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을 방문하고 싶다면 웹사이트를 통한 사전 예약을 놓치지 말자. 또한 이타미 준의 또다른 걸작 ‘포도호텔’에서 진행하는 건축예술 투어 프로그램도 박물관을 비롯한 이타미 준의 건축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니 한 번쯤 참여해 보길 추천한다.


서귀포시에 위치한 ‘포도호텔’. 제주의 낮은 구릉을 연상시킨다. ⓒpodo hotel


느린 걸음으로 빗속을 걷다, ‘절물자연휴양림’

제주도 한라산 중산간에 자리잡은 절물자연휴양림. 자연숲과 인공숲을 섞어 자연휴양림으로 조성했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빽빽하게 우거진 삼나무 숲. 키 높이를 훌쩍 넘겨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울창한 숲이 느린 걸음으로 걷는 이들을 자연 속으로 동화되게 한다. 압권은 우중산책. 비를 머금은 풀과 나무와 야생화의 내음이 어우러져 후각과 촉각을 자극하고, 뿌연 안개 속으로 걷는 느낌이 마치 태초의 자연을 연상케 한다. 홀로 거닐어도 안전할 만큼 산책로와 안내표지 등이 잘 갖춰져 있다.






제주 절물자연휴양림 ⓒJoanne Jeong


절물자연휴양림은 해발 650m의 기생화산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분화구를 만날 수 있다. 휴양림 안에는 자연관찰원, 민속놀시설, 야영장 등 다양한 볼거리 및 놀거리가 갖춰져 있고 전망대에 도달하면 제주시와 한라산도 내려다볼 수 있다.


문화, 예술, 건축을 이은 ‘뮤지엄 산’

강원도 원주시에 자리한 '뮤지엄 산'은 한솔문화재단이 1997년부터 운영해온 종이 박물관에 갤러리, 플라워가든, 명상관 등이 추가되어 종합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참여해 다양한 조형의 공간들을 자연과 접목했고 빛의 예술가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특별관도 마련되어 있어 장소의 품격을 높인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에 자리잡은 뮤지엄 산 ⓒMuseum SAN


‘산SAN’이라는 이름 안에는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 이름처럼 이곳에는 공간과 예술,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쉰다. 뮤지엄 내에서는 다양한 전시가 열리며 명상 공간, 공방, 카페 등의 부대시설과 체험 프로그램도 갖추고 있다. 아름다운 빗소리를 들으며 인간이 만든 작품(예술)과 하나님이 만든 작품(자연) 사이를 거닐다 보면 뮤지엄이 지향하는 ‘소통을 위한 단절(Disconnect to connect)’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정지연 <브리크brique> 편집장

브리크컴퍼니 설립자, 공간 라이프스타일 미디어 <브리크brique>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정치학사를, 고려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를 각각 취득했다. 방송 구성작가, 신문기자, 뉴미디어연구소장 등을 거쳐 2017년 6월 브리크컴퍼니를 세웠다. 온오프라인으로 발행하는 <브리크brique>는 도시와 공간, 사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축은 기술이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 삶 그 자체임을 깨달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