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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8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구원 <로드 투 퍼디션>

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3. 퍼디션(Perdition)은 종착점일까 출발점일까?


2002년, 느와르 영화의 연출팀으로 일하던 20대 시절이었습니다. 영화를 준비할 때는 레퍼런스가 될 만한 영화들을 밤낮없이 보게 되는데, 영화를 보는 게 업무의 일부라는 사실이 매우 행복하게 느껴지던 때였습니다. 심지어 업무 비용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특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지요.

당시 〈아메리칸 뷰티〉(2000)를 보고 좋아하던 샘 멘데스 감독의 신작으로 갱스터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저는 '업무의 연장'임을 강조하며 낮부터 팀원들을 이끌고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로드 투 퍼디션〉(2002)입니다.



포스터 출처 : www.themoviedb.org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마이클 설리번(톰 행크스)은 겉으로는 평범한 가장이지만, 실은 범죄 조직 보스 존 루니(폴 뉴먼) 밑에서 일하는 해결사입니다. 큰아들 마이클 주니어는 아버지의 정체를 모른 채 자랍니다. 어느 날 아들은 몰래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코너 루니(다니엘 크레이그)의 범죄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웠던 코너 루니에 의해 설리번의 아내와 막내아들이 살해됩니다.

설리번은 큰아들과 도피하며 복수를 결심함과 동시에 아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설리번은 조직의 자금을 빼돌리며 루니 조직을 압박하고, 살인청부업자 맥과이어(주드 로)는 이들을 추격합니다. 여정 끝에 설리번은 코너를 처단하고, 자신을 아들처럼 여겼던 존 루니와도 비극적으로 마주합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이야기를 넘어 장면의 공기, 빛, 빗속의 침묵을 다시 만나기 위해


가끔 영화를 볼 때, 감동보다 질투심이 먼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더 그랬죠.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원형적인 이야기를 고전적인 스타일로 풀어낸 능력 앞에 우리 모두 질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 눈빛과 호흡들로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저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장르나 감독 대신, “원형적이고 고전적인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이 영화는 제 리스트에 담겨, 때마다 꺼내보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어떤 영화는 나이가 들수록 이해가 깊어지고 의미가 새롭게 보이는데, 제가 이 영화를 다시 찾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드 투 퍼디션〉을 꺼내보는 이유는 그 장면들을 다시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죠.

어둠 속을 묵묵히 걸어가던 톰 행크스의 뒷모습, 펼쳐진 우산과 빗속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노년 배우 폴 뉴먼의 침묵, 기찻길 밑으로 등장하는 추격자 주드 로의 뒤뚱대는 걸음걸이 등...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을 애정하게 될 만큼 인상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합니다. 가끔은 하나의 쇼트(shot)가 이야기와 대사를 뛰어넘는 정서를 전달해 주기도 하니까요.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너무나 자신을 닮은 아들이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러니


그렇다고 폭력조차 고독하고 세련돼 보이게 만든, 겉멋 든 영화는 아닙니다. 복수 이야기의 구조를 빌려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른 삶을 남기려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복수는 분노의 표출이라기 보다, 선택의 결과에 가깝습니다. 

 

범죄 세계의 암투보다는, 아버지의 어두운 세계를 보게 된 아들과 그것을 끝까지 감추고 싶었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선택. 설리번은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나지만, 그 여정은 동시에 아들을 자기 세계에서 떼어놓기 위한 탈출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자신을 닮은 아들이기에 더더욱 아이가 총을 들지 않기를 바라며... 그런데 아이는 이미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이 영화의 긴장감은 총격전이 아니라 여기에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닮을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목적지 ‘퍼디션’이라는 이름의 의미


영화 속 이모의 바닷가 집으로 표현된 가상의 지명, 퍼디션(Perdition)은 지옥과 파멸이라는 뜻을 지닌 목적지입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도달하는 곳은 파멸일까요? 설리번에게 그곳은 아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입니다. 자신의 삶은 여기서 끝나더라도, 아이만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래서 퍼디션은 파멸이 아닌, 아이에게 다른 삶을 남기기 위한 선택의 장소로 기억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추격자를 향해 겨누었던 총을 내려놓는 순간, 〈로드 투 퍼디션〉은 갱스터 영화가 아니라, 폭력과 죄의 굴레를 끊어내는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이 영화는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된 작품은 아닐지 모르지만 단순히 총과 조직, 배신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자신의 종착점을 아들의 출발점으로 만들고 떠나는 아버지, 혹은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을 구원하는 아버지의 처절한 몸부림을 우아하게 담아낸 영화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