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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실패한 소통 [세일즈맨의 죽음]

커튼콜이 끝나지 않은 연극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1949년 초연 이후 7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꾸준히 재공연되며 여전히 관객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품이다. 대체 이 작품의 어떤 힘이 우리를 당기는 것일까? 단지 고전이기 때문일까?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이 작품의 인물들과 사건, 메시지가 끊임없이 오늘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윌리 로먼이라는 한 세일즈맨의 비극은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로 살아왔는가?”, “무엇이 성공인가?”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 마릴린 먼로는 그의 두 번째 아내였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사랑했지만, 결국 닿지 못한 말들


가족은 분명 사랑의 공동체다. 서로에게 힘이 되고, 존재 자체 만으로도 위로가 되며, 가장 깊은 곳에서 서로를 이해해주는 관계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사랑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거나 성향과 타이밍이 엇갈릴 때 가족의 사랑은 가장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가족들이 바로 그렇다. 윌리는 아들들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고 린다는 남편의 존재를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다. 두 아들 비프와 해피 또한 아버지를 존중하고 때로는 그를 이해하고 싶어 했다.


2025년 전국 순회공연중인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이미지 출처 : kopis.or.kr

로먼 가족에게 사랑이 없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가족들의 서로를 향한 사랑은 깊고 진심이었다. 문제는 그 사랑이 닿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칭찬은 오해가 되었고, 기대는 짐이 되었으며, 침묵은 방치로 읽혔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애썼지만 그 애씀은 끝내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처럼 사랑은 있었지만 소통이 실패했을 때 가족은 가장 가까운 타인이 되고 만다. 심리학자 버지니아 새티어(Virginia Satir)는 말했다.


“가족은 사랑을 배우는 첫 학교이며, 상처도 가장 깊게 남는 장소이다.”


이 말처럼 가족 안에서의 왜곡된 소통은 개인의 정체성과 대인관계, 사회적 관계 형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족 간의 소통이 단절될 때, 그것은 개인에게 고립과 불신을 남기고 심리적 외상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기도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랑은 때론 오히려 말보다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나의 진심이 상대에게 잘 전해지고 있는지를, 내가 기대하는 바가 오히려 짐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또 확인해야 한다. 진짜 비극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닿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이다.


꿈을 세일즈하다가, 존재를 잃어버린— 윌리 로먼


윌리는 전형적인 ‘미국적 성공 신화’를 좇는 인물이다. 그는 관계와 인맥을 가장 큰 자산이라 믿으며 아들에게도 사랑받는 성품이나 인기가 인생의 성패를 가른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이라는 이상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과 점점 괴리되어 간다. 자식의 진심도 아내의 헌신도 외면한 채, 그는 ‘그럴듯한 삶’을 세일즈하느라 정작 ‘진짜 삶’을 잃어버린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에게 성공이란 곧 존재의 가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는 점점 무대 밖으로 밀려난다. 젊은 시절의 관계는 사라지고,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앞에서 투명한 존재가 되어간다. 삶의 후반전에서 그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죽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다. 윌리의 시선에서 보면 그는 단지 가족을 위해 버틴 사람이다. 그는 실망만 안기려 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했던 사람일 수 있다. 단지, 그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고요 속의 절규— 린다 로먼


윌리의 아내 린다는 조용하다. 그녀는 소리 지르지 않는다.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어떤 외침보다 더 아프다. 언제나 남편의 편에 서 있으려 애쓰며 윌리가 현실을 왜곡할 때에도 자식들이 아버지를 비웃을 때에도 린다는 한 발자국 뒤에서 조용히 그를 감쌌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무대 뒤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감내하는 보이지 않는 연출자였다. 그녀의 삶은 철저히 ‘누군가의 곁’에서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린다에게는 감정의 여유가 없다. 대신 책임과 이해가 있다. 그 이해는 사랑이기도 하고 자기 포기이기도 하다. 린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윌리를 두둔한다. “그는 아직 살아 있어요”라는 대사는 단지 사실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무가치해진 존재를 향한 필사적인 외침이다. 린다의 시선에서 보면 윌리는 결코 무능한 남편이 아니라 끝까지 치열하게 살아낸 한 남자였다.


기대와 상처, 그리고 엇갈림— 비프 로먼


아들 비프는 아버지에게 깊이 사랑 받았고, 동시에 가장 큰 실망을 안긴 인물이다. 그는 윌리의 기대 안에서 자랐고, 그 기대를 짊어진 채 무너진다. 아버지의 이상을 따르려 했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과 아버지가 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프는 아버지의 거짓을 처음으로 직면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윌리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살아남거나, 진실을 택하고 거부당하거나.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는 후자를 택했고 그 대가는 아버지와의 관계 단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윌리 로먼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마지막까지도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 그의 시선에서 보면 [세일즈맨의 죽음]은 단지 한 가장의 몰락이 아니라 부자 간 화해의 실패라는 더 깊은 슬픔의 이야기다.


사랑 없는 인정욕— 해피 로먼


둘째 아들 해피는 아버지를 인정하지만 본받지 않는다. 그는 형과는 달리 갈등을 회피하고 아버지의 허황된 신념에 겉으로는 동조하지만 내면에서는 멀어진다. 해피는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버지와 같은 궤도 위에 있다. 외적 성공, 여자 관계, 인맥에 의존하는 삶.

그는 비프처럼 저항하지도 않고, 린다처럼 감싸지도 않는다. 대신 그냥 살아낸다. 그의 세계에는 회의가 없고 감정이 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그 죽음의 본질은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해피의 시선에서 보면 아버지의 죽음은 무거운 사건이 아니라 조용히 흘러가는 하나의 뉴스에 불과하다. 그의 무감각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도 닮아 있다.


실패한 성공, 그리고 세일즈된 죽음


윌리는 결국 아들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보험금을 남기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족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해방이나 위로가 아닌 실패와 죄책감을 남긴다. 죽음마저도 성과로 여겨야 했던 그의 마지막 선택은 오늘날 우리가 ‘노년’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의문을 던진다.

오늘의 사회는 여전히 ‘쓸모 있는 노인’, ‘효율적인 죽음’을 이야기한다. 존엄과 기억보다 숫자와 역할이 앞서는 시대 속에서 윌리의 죽음은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의 이야기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


박근형, 손숙, 이상윤 등의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서울 공연을 마치고 전국 순회 공연 중이다. 앞서 말한대로 [세일즈맨의 죽음]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으며, 10번 이상 영화로 제작된 작품이다(윌리 로먼의 더스틴 호프만과 비프 로먼의 존 말코비치를 만날 수 있는 1985년 영화도 추천한다).


2022년 브로드웨이 허드슨 극장에서 올라간 리바이벌 공연은 로먼 가족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설정했다. Entertainment Weekly는 이 작품이 “시스템이 작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하는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더 가치 있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2019년 웨스트엔드 공연을 리뷰한 Church Times는 “이 연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진정성에 대해, 희생이 가치 있는지에 대해, 가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선택하는 작별에 대해”라고 평했다. 이러한 평론들은 이 작품이 단지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전시장이 아니라 여전히 이 시대와 깊이 호흡하는 살아 있는 텍스트임을 말해준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윌리들을 위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은 고령화 속도 세계 1위 국가다. 그러나 노년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삶의 마지막에 있는 이들에게 여유로운 ‘정리’는 허락되지 않고, '존엄'은 비용이 들며, '돌봄'은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 된다. 많은 노인들은 “나는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복한다.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외로움에서 비롯된 결심이다윌리 로먼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는 오늘도 어딘가에서 버티고, 속이고, 감추며, 살아남으려 한다. 그리고 그 곁에는 아내 린다 같은 이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화 세일즈맨의 죽음(1985) 스틸 컷    이미지 출처 : gettyimages


“나는 누구로 살아왔는가?”, “무엇이 성공인가?”

[세일즈맨의 죽음]은 단지 오래 전 쓰여진 연극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화두를 다시 꺼내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닿지 못한 관계, 말하지 못한 진심, 그리고 너무 늦은 이해. 윌리 로만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뉴스 인터뷰 



영화 세일즈맨의 죽음(1985)


이정선 이라이프 연구원

동국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연극사와 작품연구를 강의하였다. 숭실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사회복지학 박사를 수료하였으며 초고령사회 보다 의미있는 인생의 후반기를 보내기 위한 문화예술을 접목한 프로그램과 좋은죽음을 위한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에덴낙원의 기획실장 및 이라이프아카데미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