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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3

가족이라는 것의 대가(The Price)



지난 일요일,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연극 아서 밀러의 [더 프라이스(The Price)]를 관람했다. 배우의 숨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밀착된 공간에서 아버지가 남긴 가구들로 가득 찬 무대는 마치 한 가족의 삶을 물리적으로 압축해 놓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연극의 제목인 The Price는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물질적 가치를 나타내는 '가격(price)'만이 아닌 삶의 선택과 관계의 결과로 치러야 하는 '대가(price)'를 말하고 있다.



극단 화동연우회 [더 프라이스] 의 무대 디자인 by 양영일         출처: 극단 제공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는 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사실주의 극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세일즈맨의 죽음], [시련], [다리에서 본 풍경]과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갈등을 심도 있게 탐구해 왔다. 밀러의 작품은 개인과 가족, 사회라는 삼중구조 안에서 인간 존재의 딜레마를 드러낸다. 


대공황과 몰락한 부자의 유산


아서 밀러는 1968년 발표한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가족사와 대공황 시기의 사회적 맥락을 풀어냈다고 한다. 한 때 부자였던 아버지가 몰락 이후 사시던 집이 재개발로 철거에 놓이게 되자 아버지 죽음 이후 방치 되었던 아버지의 남은 가구들을 정리하기 위해 월터와 빅터 형제는 아주 오랜만에 만나게 된다. 무대 위에는 아버지의 유산인 가구들이 잔뜩 쌓여있다. 정리해야 할 유산은 이 가구들만이 아니다. 가구들 속에는 부모의 실패와 고통, 그리고 두 형제의 다른 선택과 삶의 궤적이 담겨 있다.


아서 밀러(1915-2005)         출처 :  wikipedia


아버지의 몰락 이후 동생 빅터는 부모와 함께 남아 가족의 책임을 감당했다. 그는 아버지를 돌보며 자신의 꿈을 접었고 형 월터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성공의 길을 택했다. 이 선택은 그에게 성공과 경제적 안정은 가져다주었지만 가족과의 정서적 단절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두 형제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유산을 물리적으로는 함께 마주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극명히 다르다. 이 차이는 단지 물질적 가치를 넘어 가족 내 희생과 헌신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물질과 정신의 경계, 무엇이 유산인가? 


오늘날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는 가족 간의 유산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유산은 단지 물질적인 재산의 분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삶 속에서 나눈 희생과 헌신 그리고 남겨진 정신적 흔적의 총합이다.


연극 속 월터와 빅터 형제가 부모의 유산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모습은 실제로 많은 가족들이 노년의 부모를 돌보고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닮아 있다. 특히, 부모가 남긴 물질적 재산의 무게는 가족의 관계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부모의 돌봄을 감당했던 자녀, 거리를 두었던 자녀 그리고 각자의 선택이 남긴 상처는 비단 대경제공황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가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다.

극단 화동연우회의 공연 포스터           출처 : 극단 제공



가족이라는 이름의 역학


[더 프라이스]는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역학 관계를 보여준다. 형제는 함께 컸고, 서로 사랑하지만 선택과 희생이 불러온 결과를 극복하지 못한다. 빅터는 형에게 "우리는 이 집에서 단 10분도 진실을 만한 적이 없었어. We never told the truth for ten minutes in this house."라며 진실하지 못했던 가족의 모습을 지적한다. 반면 월터는 "너는 아버지 때문에 남은 게 아니야. 네가 스스로 고결하다고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남은거야. You didn’t stay because of Dad. You stayed because it made you feel noble."라며 빅터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갈등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실을 마주한다. 가족은 때로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가장 강하게 연결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오해와 갈등이 생기지만 그것이 바로 삶의 무게이자 인생의 의미임을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삶의 대가, 가족의 유산


물질적 유산의 '값어치(Price)', 선택에 대한 '대가(The Price of Choice)', 관계와 책임의 '대가(The Price of Relationships)'. [더 프라이스]는 물질적 유산을 넘어선 가족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가족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 있어 삶의 출발점이며, 우리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는 존재다. 아서 밀러가 던진 질문은 단순히 연극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족, 그리고 삶의 대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주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좁힐 수 없는 의견 차이로 뛰쳐나간 형 월터는 동생 빅터를 언제 다시 만나게 되었을까? 그들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화해할 수 있을까? 연극은 이 질문에 답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더 프라이스]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분명하다. 나는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어떤 대가를 감당하며 책임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화해할 것인가? 이 질문은 각자의 삶 속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정선 이라이프 연구원

동국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연극사와 작품연구를 강의하였다. 숭실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사회복지학 박사를 수료하였으며 초고령사회 보다 의미있는 인생의 후반기를 보내기 위한 문화예술을 접목한 프로그램과 좋은죽음을 위한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에덴낙원의 기획실장 및 이라이프아카데미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