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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의 소망
인생의 모든 괴로움의 뿌리는 결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이 자라면 자랄수록 이 결핍은 더욱 커집니다. 사람들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불만과 불평, 질투와 분노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곳은 바로 인간의 내면으로, 여기에 결핍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미 가진 사람이 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다 가진 사람인데도, 때로는 단 한 가지 가지지 못한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그 목마름 때문에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부활소망안식처 1관에 설치된 박장근 작가의 [예수님의 빈 무덤]
살다 보면 사람들마다 부족한 것이 다릅니다. 인생에 있어 시달리는 결핍의 대상도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부족하고, 또 어떤 사람은 권력에 목말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지식의 결핍에 웅크리고 있거나 인기나 명예가 부족한 현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정말 사실일까요? 실제로 이것들 때문에 그토록 괴로운 것일까요? 그 부족한 것들이 다 채워지고 그래서 ‘당신은 더 이상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며 모든 사람이 인정해주면 그 결핍은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의 뿌리는 부족과 결핍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부족감과 결핍감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인식과 모자라다고 느끼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느낌의 장소인 마음을 그토록 중시하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지키고,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내 마음을 내가 언제나 주인 노릇 할 수 있다면 구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거나 지킬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유명인 이나 역사적인 인물이라 하더라도 항상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해 무너집니다. 그것을 가장 안타까워합니다.
Annibale Carracci - Holy Women at Christ' s Tomb(1590) 출처 : Wikipedia
이에 대해 성경은 그 모든 결핍과 부족의 뿌리가 죄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자신만의 제한된 자원으로 살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이 슬그머니 올라감으로써 빚어진 증상의 첫째가 결핍감입니다. 따라서 결핍감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리에 다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첫 번째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은 나의 제한된 자원과 능력으로 사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과 능력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곳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꺼이 수용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양식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부족감과 결핍감에 시달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곳의 대기는 사랑이고, 그곳의 물은 생명입니다. 흘러 넘치는 생명력과 다함이 없는 사랑을 누리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Guido di Pietro - Resurrection of Christ and Women at the Tomb(1439-1443) 출처 : Wikipedia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인간의 성공과 행복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세상의 것들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채울 수 있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충분하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 곧 복음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통용된 일반적인 의미의 복음, 좋은 소식은 새 황제의 등극 소식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승전의 소식,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들은 복음은 정확히 이 내용과 일치합니다.
바로 새 왕이 등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예언된 전쟁을 승리로 끝내셨습니다. 뱀은 머리가 깨졌지만, 예수님은 발꿈치를 상하신 것에 그쳤습니다. 예수님은 끝내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영원히 확정되었습니다. 사실 세상을 이기셨기에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실 것이기에 무덤에 누우셨습니다. 이것을 누가 믿었으며, 누가 깨달았습니까?
부활소망안식처 1관에 설치된 박장근 작가의 [예수님의 빈 무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새 돌무덤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생전에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지 못한 것을 못내 후회했을 것입니다. 한밤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좀 더 일찍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백 리트라 정도의 향품을 갖고 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 했던 제자들은 누구도 예수님의 시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규례 때문에 십자가까지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갈릴리의 여인들도 산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어떤가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을 예수님께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다 어디에 있었습니까? 요한만이 십자가까지 따라갔을 뿐 나머지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다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에 잠겨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마리아가 숨가쁘게 전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습니다.”
Rembrandt - Christ and St Mary Magdalen at the Tomb(1638) 출처 : rct.uk
안식일 후 첫 날, 갈릴리의 여인들은 돌로 된 무덤 문을 어떻게 열지 걱정을 하며 갔지만, 무덤의 돌은 굴려져 있었고 흰 옷 입은 청년이 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다”(막 16:6) 부활의 첫 열매는 이렇게 열렸습니다. ‘보라! 무덤은 비었다. 보라! 빈 무덤이 너희들에게 소망이 되리라.’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회복되었습니다. 구원은 속량입니다. 구원은 해방입니다. 구원은 자유입니다. 모든 결핍감, 모든 부족감, 모든 불안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오직 감사의 기도일 따름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저희 모두에게 빈 무덤의 소망을 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빈 무덤의 부활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
는 사실을 의심치 말고 따르라고 초대해 주셨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이 십자가의 지혜와 빈 무덤의 소망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지혜와 소망으로 모든 결핍에서 풀려난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조정민 목사
베이직 교회 담임목사이며, 에덴낙원의 운영이사. 25년 간 MBC기자 및 앵커 등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47세에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꿈을 품고 목사의 길로 들어섰다. 이 시대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등을 통해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들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