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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클라리넷 오중주
Brahms, Clarinet Quintet in B minor, Op.115
11월 초, 가을이 깊어질 무렵의 햇살은 정겹고 따사롭다. 10월 중순께 예정했던 설악산 단풍 여행 계획이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됐지만 그리 아쉽진 않다.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기슭에 있는 집 주변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늦가을 정취를 충분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후 6시가 되기도 전에 어둠이 찾아오고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곧 다가올 추운 겨울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 70을 바라보는 내 인생과도 같은 늦가을의 쓸쓸함이 더해져 마음이 허전해질 때가 많다. 이럴 땐 와인 한 잔과 책, 그리고 가을에 어울리는 음악과 함께 공허한 마음을 달래 보기도 한다.
이미지 출처 : Berliner Philharmoniker 공식 페이스북
관현악단(管絃樂團, Orchestra)을 구성하는 관악기와 현악기 중에서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는 클라리넷과 첼로다. 목관악기 중에서 가장 높은 음역을 담당하는 플루트가 봄에 어울리는 음색을 지녔다면, 중음역을 주로 담당하나 음역이 넓고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클라리넷은 가을의 풍경과 닮았다. 다른 목관악기에 비해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클라리넷은 18세기 초엽 모습을 드러낸 이후, 모차르트, 베버 등 고전주의 시대 음악가들이 클라리넷 독주를 위한 명곡들을 남겨 목관악기 중 가장 사랑받는 악기로 자리매김했다.
Johannes Brahms(1833-1897) 이미지 출처 : Wikipedia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브람스가 유독 클라리넷을 좋아해 관악기가 포함된 실내악곡으로 호른 삼중주 한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클라리넷을 위한 작품들을 썼다. 클라리넷 소나타 2곡, 클라리넷 삼중주, 그리고 가장 널리 알려진 명곡 클라리넷 오중주를 포함해 클라리넷이 주인공인 실내악곡을 4곡이나 남겼다.
유독 늦가을 날씨와 풍광에 어울리는 작곡가 브람스, 그리고 가을 음색의 클라리넷... 이 계절이 지나가기 전에 꼭 한 번쯤 브람스의 클라리넷 오중주를 들어야 할 것 같다.
클라리넷을 위한 협주곡이나 실내악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아마 모차르트의 작품일 것이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삽입돼 더욱 사랑받게 된 클라리넷 협주곡(1791년)과 천국에서도 흘러나올 것만 같이 아름다운 클라리넷 오중주(1789년)는 고금의 모든 관악기를 위한 작품 중에서 최고의 자리에 위치한 명곡이다. 그에 필적할만한 클라리넷 작품이 탄생하기까지는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마이닝겐 궁정악단(1882) 이미지 출처 : Wikipedia
1891년 3월, 58세의 노대가(老大家) 브람스가 자신의 후원자이자 당대 명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의 초청으로 마이닝겐(Meiningen, 프랑크푸르트와 라이프치히 중간에 위치한 마을)을 방문했을 때, 당시 유럽 최고 관현악단 중 하나인 마이닝겐 궁정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 리하르트 뮬펠트의 모차르트 연주를 듣고 그 오묘한 음색에 흠뻑 빠져들었다.
우수에 젖은, 그러나 때로는 가을 햇살처럼 정겹고 따사로운 음색을 지닌 클라리넷은 노년 브람스의 창작 의욕을 다시 지피게 했고, 그해 여름 브람스는 클라리넷과 현악사중주가 함께 연주하는 그의 말년의 걸작 클라리넷 오중주를 완성했다.
이미지 출처 : clarinetquintet.web.unc.edu
전 4악장으로 구성된 클라리넷 오중주(Clarinet Quintet in B minor, Op.115)는 40년 가까운 창작 경험에 노년의 비장함과 체념이 더해져 브람스 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늦가을의 정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와 함께 관악기가 포함된 실내악곡 중 최고의 명곡으로 사랑받는 작품이다.
전체 연주시간 40분가량의 대작으로 1악장 첫 주제선율부터 인상적이다. 두 대의 바이올린으로 시작해 비올라와 첼로가 이어받은 후 클라리넷이 합세해 연주하는 주제선율은 온화하고 부드럽지만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를 느끼게도 한다. 이후 클라리넷과 현악기들이 서로 대화하듯 전개해 나가면서 ‘명상’ ‘체념’ ‘가을의 저녁놀’과 같은 이미지를 주로 그려내지만 가끔은 따사로운 햇살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면서 조용히 끝을 맺는다.
아다지오 빠르기의 2악장은 3부로 구성돼있다. 다소 어수선한 화음으로 시작하다가 제1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가락에 클라리넷 음색이 더해져 서로 대화하듯 선율을 주고받는다. 2부에서는 클라리넷이 주도적으로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집시풍의 선율을 노래하면서 온화함 속에 감춰진 정열을 드러내고, 3부에서 다시 제1 바이올린과 함께 그리움과 고뇌가 가득한 분위기를 조성한 후 짧은 클라리넷 독주로 인상 깊게 끝을 맺는다.
이미지 출처 : fidelio.cafe
3악장은 다소 빠른 해학적인 분위기의 스케르초 악장으로 헝가리 집시풍의 흥겨움과 애환이 섞여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흥겨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즈음에 갑자기 분위기가 식으며 조용하게 4악장을 준비한다.
마지막 4악장은 콘 모토(con moto, 생생하게 또는 움직임을 가지고 약간 빠르게 연주) 악장으로 주제와 5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친숙한 민요풍의 주제선율이 제시된 후 서로 다른 빠르기로 이질적인 5개의 변주곡이 전개된다. 때로 경쾌한 선율도 등장하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온화하며 우아하다. 그리고 쓸쓸하다. 5개의 변주가 끝나면 친숙한 1악장의 주제가 다시 등장해 곡 전체의 분위기를 다시 상기시키며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Brahms am Flügel(Willy von Beckerath作, 1896) 이미지 출처 : Wikipedia
브람스의 음악은 가을의 음악이고 저녁의 음악이다. 다소 쌀쌀한 늦가을 저녁놀 무렵의 풍경과 닮아있다. 낭만주의 시대를 살면서도 시류에 휩싸이지 않고 굳건히 고전주의 시대 음악가들의 뒤를 밟았던 브람스는 당시 유행한 표제음악이나 바그너 풍의 오페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남긴 4곡의 교향곡은 베토벤의 교향곡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위대하며, 베토벤이 9번 교향곡을 완성한 후 현악사중주의 세계에 천착한 것처럼 브람스는 52세에 마지막 4번 교향곡을 완성한 이후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실내악 작품에 전념했다. 그 실내악 작품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곡이 클라리넷 오중주다.
♬ 연주곡 들어보기
Brahms, Clarinet Quintet in B minor, Op.115
유재후 교수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 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