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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스토리텔링 읽기
#12 영화'그린북’
우리의 인생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절망의 순간, 극한의 순간에서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시작된다. 모든 게 다른 두 남자가 그러한 순간에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는 영화 [그린북]을 살펴본다.
영화 ‘그린북’은 피터 패럴리 감독이 연출한 2019년 개봉한 작품이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196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면서도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어 그 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남우조연상을 비롯 다수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영화 [그린북] 공식 포스터 출처 : 네이버영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62년,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프랭크 토니는 나이트클럽의 경호원으로 일하다 클럽이 문을 닫자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토니는 우연한 기회로 미국 남부 순회공연 예정인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운전기사 보디가드 일을 제안받는다. 토니는 모셔야 할 사람이 흑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액의 월급과 단기라는 점에 끌려 일을 맡게 된다.
영화 '그린북'의 모티브가 된, 빅토르 휴고 그린(오른쪽)의 '흑인 여행자를 위한 그린북' 초판 출처 :wikipedia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린북’은 흑인들이 여행할 때 출입이 가능한 숙박시설과 음식점 등을 모아 놓은 책이다. 1936년에 최초 발간된 이 책은 인종차별이 존재하던 60년대에도 존재했다. 그만큼 미국의 인종 차별은 뿌리가 사회 전반에 깊이 박혀 있었다. 아무리 고등 교육을 받고 성공한 음악가인 셜리 역시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토니는 가는 곳마다 차별받는 셜리를 보며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인종차별의 거대한 벽을 실감한다.
당시 국립공원이었던 루이스 산의 흑인 구역 안내판 출처 : wikipedia
이후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티격태격 로드 무비형식을 띈다. 흑인이지만 지식인이자 상류층인 셜리와 건달 출신의 불량한 태도와 말투를 가진 토니는 사사건건 충돌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자신의 능력(?) 을 발휘하여 공연을 순조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토니에게 셜리는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셜리는 토니가 아내에게 쓰는 편지를 교정해준다. 단순한 내용에 철자마저 엉망인 토니의 편지는 셜리의 풍부한 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코치로 토니의 아내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다.
영화 [그린북]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그렇게 두 사람이 조금씩 가까워질 즈음, 여전한 남부 지역의 인종차별은 셜리를 급기야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로 만들고야 만다. 한편, 토니에게는 폭력 조직에서의 영입 제안이 들어오고, 생계 문제로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 앞에 서 토니는 고민한다.
어떤 스토리든, 주인공은 그린북의 토니와 셜리처럼 위기의 순간에 봉착한다. 이야기의 초반에 목표를 만나고, 그 목표를 위해 달려가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성공의 가능성이 어렴풋하게 보일 즈음, 주인공은 자신이 그동안 기울인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 정도의 심각한 위기에 맞닥트리게 되는 것이다.
영화 [그린북]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스토리텔링에서는 플롯에서의 이러한 순간을 지칭하는 용어가 따로 존재한다. ‘절망의 순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복수 때문에 오필리어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 햄릿[희곡, 햄릿]에게도, 딸을 위해 살인죄의 누명을 뒤집어써야 하는 아버지[영화, 7번 방의 선물]에게도 이 순간은 존재한다.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극적인 스토리텔링에는 이 어둠의 시간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짧게는 하루,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 금식을 시작한 이에게도 식욕을 참을 수 없는 극한의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시간을 길게 늘려보면,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에게는 부부 생활, 임신과 육아, 그리고 노년과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인생의 전환점마다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영화 [그린북]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인공들이 ‘절망의 순간’, ‘영혼의 어두운 밤’에서 고뇌하고 그 시간을 현명하게 극복해 내는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교훈과 지혜를 얻는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8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토니는 자신 역시 마음 깊은 곳에 인종차별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영화 [그린북]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셜리는 스스로 만든 벽을 무너뜨리고 토니가 내민 손을 잡는다. ‘절망의 순간’, ‘영혼의 어두운 밤’을 용기와 지혜로 극복한 자가 맞이한 다음날은 그전과는 다르다. 그는 분명 이전보다 현명하고 강인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 그린북의 주인공 돈 셜리의 실제 연주 영상
1955년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돈 셜리의 'How High The Moon'
김경모 작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을 전공하였다. 목원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 학과에서 스토리텔링을 강의했다. EBS 애니메이션 시리즈 ‘미스테리야’의 스토리를 집필했으며, 현재 제주에 머물며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의 스토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