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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에덴클래식 #25 고인을 추억하는 클래식



존경하는 선배 루빈스타인이 1881년 파리에서 숨을 거두자 그의 사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후임 교장으로 차이콥스키가 물망에 오른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이를 사양하고 루빈스타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를 추모하기 위해 피아노 3중주 곡을 만든다. 그리고 1882년 3월 루빈스타인의 1주기 즈음, 이곡은 비공개로 초연된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3중주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

Tchaikovsky, Piano Trio in A minor, Op.50 ‘À la mémoire d’un grand Artiste’


학교 공부 외에는 취미생활을 즐기기 쉽지 않았던 고등학생 시절, 누님의 권유로 접하게 된 클래식 음악은 내게 신세계였다. 이 멋진 취미를 함께 즐기고 싶어 많은 친구에게 클래식 음악 감상 권유를 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한 곡 감상하는데 30분 이상씩 걸리는 작품을, 그것도 멜로디에 익숙해지려면 10번 이상 집중해서 감상해야 하는 클래식 음악이 한창 즐길 거리가 많을 2, 30대 청년들의 취미생활로 자리 잡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40여 년 전 같은 날 입사해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친해진 친구가 있다. 그 친구도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기에 친밀감은 더했고, 직장에서 은퇴한 요즘도 자주 만나 음악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유독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3중주를 좋아했다. 슬픔을 넘어 비장함이 40여 분 가량 지속되는 이 장대한 실내악곡을 좋아하는 이유도 들었었다.


몇 달 전, 같은 회사에 다녔던 직장 선배가 오랜만에 연락해 와 그 친구와 셋이 점심을 함께한 자리에서 선배는 뜻밖의 소식을 전했고, 친구는 한동안 충격에 빠진 듯했다. 40여 년 전 친구는 그 선배의 사촌 여동생을 소개받아 한동안 연인으로 지냈다. 그러다 둘은 헤어졌고 그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친구의 가슴 속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 여인이 친구에게 건넨 생일선물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3중주가 수록된 음반이었기에 그 곡은 당시 그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듣는 곡이 되었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었다. 그런데 선배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그 여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친구는 그날 저녁 아직도 고이 보관하고 있을 그 음반을 꺼내 들으며 옛 추억과 슬픈 소식을 다시 한번 가슴 속에 간직했을지도 모르겠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출처 : 위키피디아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가 1874년(34세)에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비창교향곡’, ‘백조의 호수’ 등과 더불어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피아노 협주곡 중의 하나다. 차이콥스키 자신도 매우 만족해했던 이 곡을 완성한 후, 친분이 두터운 선배 작곡가이자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kolai Rubinstein, 1835~1881)에게 들려주며 초연을 부탁했다. 그렇지만 예상 밖으로 루빈스타인은 혹평하며 개작을 요구했다. 격분한 차이콥스키는 개작을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그와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1872)     출처 : 위키피디아


초연할 피아니스트를 만나지 못한 이 협주곡은 완성한 지 1년 가까이 지난 후인 1875년 미국 연주 여행 중인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에 의해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한 달 후에는 모스크바에서도 초연되어 박수갈채를 받았다. 훗날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혹평을 사과하는 한편, 이 협주곡을 자신의 연주회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 차이콥스키를 기쁘게 했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1881년(41세), 차이콥스키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모스크바음악원 교장이자 친분이 두터운 5년 연상 선배 음악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슬픔에 젖은 차이콥스키는 그를 진정으로 애도하고자 그의 영혼에 바치는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À la mémoire d’un grand artiste)’라는 부제를 붙인 피아노 3중주를 완성했다. 두 개의 악장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전체 연주시간이 40분이 넘는 장대한 작품으로, 차이콥스키가 남긴 유일한 3중주곡이자 그의 전 작품 중 작곡 기교나 예술성에 있어 가장 뛰어난 곡으로 꼽을만한 명곡이다.


1악장


‘비가풍의 악장’이라는 부제가 붙은 1악장은 조용한 피아노의 분산화음을 배경으로 비통한, 그러나 아주 아름다운 비가悲歌를 첼로가 연주하고 바이올린이 뒤를 이으며 시작한다. 이어 세 악기가 절묘한 화음을 이루면서 슬픔은 고조되고, 절규하는듯한 주제 선율이 격렬하게, 때로는 조용히 조화를 이루며 전개된다. 침울한 저음의 첼로를 위로하는듯한 바이올린 선율은 슬픔을 배가시키고, 피아노의 화려함은 현악을 감싸며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듯하다가 코다(coda, 끝맺음)에 이르러 첼로와 바이올린의 비가에 동조하며 조용한 여운을 남긴 채 20분 가까운 긴 슬픈 여정을 마무리한다.


2악장


2악장은 피아노 3중주 편성으로는 드물게 변주곡 형식이다. 주제와 11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된 1부, 그리고 마지막 변주곡과 코다(coda, 끝맺음)로 구성된 2부로 나눌 만큼 큰 규모의 악장으로 연주시간이 25분에 달한다. 피아노 독주로 제시되는 2악장의 주제 선율은 차분하고 아름답지만 이어 전개되는 11개 변주곡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1악장과는 달리 밝고 경쾌하다. 생전의 루빈스타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듯 다양한 감정으로 주제가 변주되면서 전개된다. 왈츠풍으로도 변주되며, 활기찬 마주르카의 선율도 흐른다. 피아노가 주인이 되기도 하고 바이올린과 첼로가 앞장 서가며 변주를 전개해 나가기도 한다. 다소 슬픈 표정의 9번째 변주는 지극히 섬세하고 우아하다. 화려한 마주르카 풍의 10번 변주에 이어 주제 선율이 그대로 연주되는 11번 변주에 이르러 분위기는 다시 차분해진다. 이어 격렬하게 펼쳐지는 2부는 힘차고 화려하다. 그렇지만 밝은 분위기는 아니다. 1악장의 비가를 다시금 드러내는 끝부분은 이 곡의 클라이맥스다. 비통하고 격렬하게 다시 나타난 1악장의 주제 선율은 점차 감정을 억제해나가다 피아노의 침울한 반주로 아주 느리고 비통하게 바이올린과 첼로가 번갈아 슬픈 선율을 연주하다 피아노만 남긴 채 조용히 끝을 맺는다.




한 저명한 음악평론가는 “차이콥스키의 단 하나의 작품을 고른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3중주곡을 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창교향곡’, ‘백조의 호수’ 협주곡 등 많은 걸작을 뒤로한 채 피아노 3중주를 차이콥스키의 최고 작품으로 내세우는 것은 이견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고금의 모든 피아노 3중주 곡 중에서 이처럼 다양한 감정을 짙은 호소력으로 표현해낸 작품은 찾기 어렵다. 특히 2악장 끝 무렵, 1악장 첫 주제 선율을 세 개의 악기가 격한 감정으로 다시 노래하다가 장송 행렬의 쓸쓸한 발자국 같은 피아노 독주만을 남긴 채 조용히 애절하게 끝을 맺고 나면 한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 음악 들어보기 


차이콥스키, 피아노 3중주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


1.  16th Verbier Festival, 2009

피아노: 에프게니 키신, 바이올린: 조슈아 벨, 첼로: 미샤 마이스키, 




2. Studio recording, Moscow, 2.I.1952

피아노: 에밀 길렐스, 바이올린:  레오니드 코간, 첼로: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 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