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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9

빛,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최규현 작가의 화폭에는 청량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담긴다. 서른 초반을 지나는 젊은 화가의 눈빛과 언어는 작품에서 보던 선명한 색들을 닮아 있었다. 한창 푸른 에덴의 여름을 그리는 일정에 잠시 동행했다.



전시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이제 작품 주문도 들어가고, 조금씩 정리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평소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틈틈이 그동안 못 만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올해 2월, 5월 두 번의 개인전을 진행하셨죠,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함이 큽니다. 개인전이라는 자체가 예술가에게 굉장한 축복인데, 그동안의 제 노력 이상으로 많은 분이 잘 봐주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계속 작품 활동은 해왔지만, 단체전 한 번 빼면 밖에 내보인 게 처음이기도 하고요.


최근 활동이 활발해진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예전에는 아직 때가 안 왔다는 생각이 계속 있었는데, 계기를 꼽자면 코로나 때문인 것 같아요. 팬데믹으로 생활이 모두 비대면이 되면서 미국에서 혼자 지내던 저는 평소보다 외로움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몇 년 전, 자전거를 타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 때문에 이번에 몸도 마음도 추스를 시기라고 느꼈어요. 휴학 후 한국에 들어와 쉬던 중에 이렇게 일들이 진행된 거예요.


쉬어가려던 차에 기회가 찾아온 셈이네요.

한국에 온 후 일이 잘 풀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전엔 기회가 와도 두려움이 있고, 더 예민해지기도 했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회가 오면 그대로 다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적극적으로 뭐든지 해보자는 멘탈리티가 생기더라고요. 아마도 교통사고와 코로나라는 상황을 겪으면서 찾아온 어려움들이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한 것 같아요. 


한국에선 가족과 함께 지내고 계시죠, 작가님께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요?

가족은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예요. 우선, 제가 원하는 길, 미술 하는 저를 큰 반대 없이 지원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함이 크고, 두 분 모두 박사셔서 학문적인 걸 좋아하시니까, 배울 점도 많죠. 제가 닮은 부분도 많다 보니 같은 주제로 대화하면 참 좋아요. 또, 누나와도 항상 사이가 좋아서, 정확히 말하면 제가 보살핌을 많이 받았어요.

가족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셈이죠. 이런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예전엔 가족이나,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랑을 당연히 여기기도 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계속 미국, 한국을 번갈아 오가며 변화하는 환경 속에 살다 보니, 지금 생각하면 그 것 때문에 마음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쌓였던 것 같아요. 이제야 그 벽이 무너지는 느낌이에요.



에덴낙원 푸른 여백 속 최규현 작가. 사진: 박용빈


작품을 보면 사실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는데, 어떤 모티브가 있었나요?

예전에는 저의 상상력이 초현실주의 쪽을 특히 좋아했어요. 추상적인 것을 그리는 걸 선호했죠. 그러다 한번은 대학에서 페인팅 기초 수업을 들었는데 누드 모델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수업이었어요. 덴Den이라고 불리는 교수님께서 간단한 이론에 바탕을 두고 꽤 독하게 가르치셨죠. 대부분 그분을 정말 싫어하든 좋아하든 둘 중 하나였는데, 제 경우엔 그 분께 배우는 게 참 좋았어요. 그저 보이는 사물 그대로 그리라는 가르침 자체가 새롭고 즐거웠거든요. 그때부터 저는 판타지 위주에서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쪽으로 극과 극을 완전히 옮겨간 거예요. 그냥 보이는 풍경 그대로 페인팅하는 데 빠졌죠.


새로운 차원의 작품 세계가 열린 거군요.

이렇게 그리면서 보니 그림이 점점 현실에 다가갈수록 짜릿함을 느껴요. 계속 그 감정을 쫓아서 가다 보면 더욱더 사물, 사람을 진짜 현실과 근접하게 그릴 수 있게 되죠. 한 번은 수업에서 여자 모델을 그린 적이 있는데, 모델이 한쪽 다리를 위로 올려서 옆으로 꺾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제 그림을 보고 다리에 초록빛이 안 보이냐고 물으셨는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직접 제 붓으로 녹색을 섞어 선 하나를 쓱 그으시니까 갑자기 그림이 완전히 살아났어요. 안 보이던 초록빛이 딱 보이면서, 진짜 살아있는 그림이 된 거예요. 색깔만 잘 찾아내도 이렇게 확 달라질 수 있구나, 깨달았죠.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그림이라는 건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내는 게 더 심오하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어요. 마치 탄산주가 '탁' 하고 터지듯이 통쾌하고 밝은, 훨씬 상쾌한 느낌이에요.




그는 유화 전공을 바탕으로 태블릿으로 작업한 디지털드로잉 작품을 선보인다. 사진: 박용빈


아이패드로 그리면서 순수미술과 다른 길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그런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전부터 태블릿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애니메이션, 만화를 좋아했거든요. 아시다시피 웹툰 작가들이 다 태블릿을 쓰잖아요. 거기서 보게 된 거죠. 예전엔 휴대할 수 없이 무거운 장비들뿐이었는데, 이렇게 가볍고 편하게 돼 버리니까, 나오자마자 그냥 ‘아, 이건 사야겠다’ 싶었어요. 원래는 그냥 스케치 도구로만 쓸 작정이었는데, 편리함이 그걸 넘어선 거죠. 작업에 제약이 없어지는 데, 달리 주저할 필요가 없었어요. 유화는 만약 그리고 싶은 풍경이 있어도, 예를 들어 카페 안이나, 누구의 집이라든지, 그림을 그리려면 세팅 자체만 해도 민폐일 정도로 번거롭거든요. 냄새도 심하고 물감이 묻으면 지저분해지기도 하고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리죠. 반면에 아이패드는 그리고 싶을 때 바로 꺼내서 작업할 수 있으니까 그 편리성이 정말 좋았어요.

또, 아까 그 수업에서 교수님이 ‘너희가 무슨 색깔을 쓰든 항상 다르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수정하면서 원색에 근접하게, 최대한 가까워질 때까지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거죠. 아이패드로 작업하면 특히 색깔을 자유자재로 선택해 컬러스케치하는 면에서도 훨씬 만족감이 커요.


사실의 풍경을 기반으로 작업한다는 말씀을 들으니 작품이 또 새로이 보입니다. 보통은 사진을 찍어 작업하시나요?

웬만해선 사진을 찍지 않아요. 시도해본 적이 있는데,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더라고요. 색 때문이에요. 사진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거든요. 사진은 찍고 나면 기록이 되는데, 그것과 제 기억 속의 색들이 다를 수도 있어요. 제 기억이 사진으로 인해 위협을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차라리 찍지 않는 편이 낫다고 봐요. 간혹 건축물의 기와나 타일처럼 복잡한 걸 그릴 때는 사진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 보는 것으로는 눈이 제일 뛰어난 도구이니까요. 또,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분석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눈이 보고 있는 것을 뇌로 분석하고 또 손으로 그걸 찾아내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작업의 과정이죠.



최규현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장면을 캐치하면 즉석에서 시작하고 그 자리에서 완성한다. 사진: 박용빈


작품이 될 장면은 어떻게 정하시나요?

그건 감각적으로 고르는 것 같아요. 딱 이거다 하는 풍경이나 순간이 있어요. 봤을 때 예쁘다 싶으면 가능한 그때 바로 그리려고 하죠. 난감할 때도 있어요. 특히 운전하다 발견할 때는 굉장히 아쉽죠. 그래도 일단은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저는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요. 그때그때 바로 작업할 수 있으니까요. 일단 ‘지금 그려야겠다’ 싶은 장소를 찾아내면 그 자리가 횡단보도가 아닌 이상(가끔은 횡단보도 중간에서 그리고 싶을 때도 있긴 하지만) 최대한 바로 앉아서 그리기 시작해요. 어쩔 수 없이 못 그린 장소는 휴대폰에 저장해 두거나, 사진을 찍어 뒀다가 다시 찾아가기도 해요.


보통 즉석에서 작업을 하고 마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때에 따라 좀 다른 데요, 정오를 전후로는 해가 좀 위에 있으니까 3~4시간도 할 수 있어요. 풍경이 많이 변하지 않거든요. 반대로 해가 내려갈 때는 빛이 계속 변해서 오래는 못 해요. 길어야 10~20분, 어떤 때는 5분 안에 끝내기도 하고요. (아이패드에서 10분 안에 끝낸 그림들을 찾아 보여주며) 이럴 때는 사진을 찍어도 하늘빛이 확 죽어버리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오로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정말 예쁜 것 같아요. 이런 초록의 색을 살리려면 바로바로 그리거나 기억했다가 리터치를 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짧은 시간 안에 작업하려다 보면 자연히 훈련이 되시겠어요.

맞아요. 처음엔 이렇게까지 만족스러운 색깔을 금방 잡아내지 못했어요. 이렇게 작업한 지 이제 6년 정도 되는데요, 전에는 작업 후에 수정을 많이 했거든요. 지금도 약간씩은 수정이 있지만 훨씬 적어졌죠. 아무래도 좀 빨라져요. 그전에 유화를 공부한 것도 도움이 됐고요. 제가 디지털 채색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모두 유화의 지식을 바탕으로 도전을 한 거예요. 적응하는 데는 오래 걸렸지만, 이제 많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우연히 걷다 만나는 풍경이 작품이 될 때가 많다. 사진: 박용빈


작가님만의 그림 그리는 원동력은 뭔가요?

원래는 추상도, 풍경도 처음 시작할 때는 모두 환상적이거나 재미가 있는 공간을 그리길 좋아했어요. 아마 그 이미지가 주는 희열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글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시, 소설 또, 단편…. 이미지로 보면 그림은 시에 가까운 것 같아요. 루 샤오동Liu Xiaodong이라고 중국의 유명한 화가분이 한 인터뷰에서 재밌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림은 굉장히 제한적이래요. 영화는 여러 가지 이미지, 소리 다 만들 수 있는데, 그림은 딱 한 장으로만 표현해야 하니까 그걸 두고 ‘제한적이다’라고 한 거죠. 그런데 저는 그런 점 때문에 그림이 좋아요. 하나의 풍경만으로 누구나 ‘우와’하고 감탄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걸 담아내는 게 정말 재밌어요.


이번에 에덴낙원에서도 그런 순간과 장면들을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원래부터 티하우스 주변을 좋아했어요. 지붕의 모양과 미로처럼 꾸며진 그 주변의 정원이 마음에 들고요. 벽돌로 쌓은 붉은 담도 그렇고 또, 부활교회와 안식처 내부에 중정이 있는 공간은 차분한 느낌이 들어 좋아요. 저는 사람이 많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풍경을 좋아하는데, 사람이 북적이는 레스토랑 안쪽도 그려보고 싶네요.


에덴낙원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작가님은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선 미술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죽음’은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설치작가 중에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라는 분이 있어요. 콜롬비아 출신의 내전이 끊이지 않는, 죽음이 너무나 흔해져 버린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죠. 그는 많은 이들이 죽음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그 심각성을 상기시키고자 작품 활동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저도 죽음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지난번 교통사고로 얼마 동안 오른쪽 손가락을 잘 굽히질 못했어요. 다시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언제라도 갑자기 몸이 망가지거나 생각지 못한 일들이 다가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고의 작품을 딱 하나 그려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거예요. 매회 그릴 때마다 '이번이 나의 최고의 작품이 될지 모른다, 최선을 다해서 잘해보자' 다짐하는 거죠.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요.




작은 변화도 작품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그는 요즘 들어 인생의 축복과 감사함을 더욱 느끼고 있다. 사진: 박용빈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한동안 전시로 바빠 많이 그리지 못했는데, 이번 에덴낙원 작품을 비롯해 다시 작업을 부지런히 해보려고 합니다. 8월에는 새로운 전시 계획도 있고요. 얼마 후면 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전까지 길이 열리는 쪽으로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리고, 가족에 관해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

그동안 가족에게 부족했던 부분이 속마음을 표현하는 거였어요. 전엔 제가 느끼는 감정들을 겉으로 드러내기가 좀 망설여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여러 변화를 겪으면서 이제는 애정이나 감사함을 최대한 많이 표현하는 쪽으로 제 결심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밖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더 배우려고 하고요.

기쁜 건 이런 변화를 가족들이 알아봐 주고, 진심으로 좋아해 준다는 점입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특히 가족에 대한 이런 변화는 더 말할 것도 없겠죠. 다시 말해 가족은 저에게 가장 큰 축복이자 감사함이라는 걸 더욱 깨닫는 요즘이에요.




Albert Kyu-Hyun Choi Edenparadise Collection 2022





엔젤하우스 2 ©Albert Kyu-Hyun Choi, 2022


티하우스에덴 ©Albert Kyu-Hyun Choi, 2022



부활교회 ©Albert Kyu-Hyun Choi, 2022



부활소망안식처 ©Albert Kyu-Hyun Choi, 2022



엔젤하우스 1 ©Albert Kyu-Hyun Choi, 2022 




  최 규 현   화 가

Albert Kyu-Hyun Choi


빛과 풍경에서 생명력을 표현하는 젊은 화가.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스쿨(SAIC) 졸업 후,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전공인 유화를 바탕으로 태블릿을 활용한 디지털 채색 작품을 선보인다. 2022년 2월 산지갤러리에서 신진작가 발굴 기획전의 일환인 최초의 개인전을, 5월에는 갤러리 초이콘템포러리아트에서 LA 풍경을 담은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황은비 에덴미디어 편집장

에디터, 기자, 에세이스트. 언론을 전공하고 매거진, 일간지 등 매체에서 일했다. 현재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오가며 기억될 콘텐츠를 고민하고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