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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31

에덴클래식 #17 독보적인 연주가 돋보이는 클래식



음악 감상의 즐거움은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서도 좌우되곤 하는데, 파가니니의 작품은 그의 천재적인 연주 덕분에 더욱 빛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영광은 길이길이 작곡가 자신 뿐 아니라, 오늘날 음악을 듣는 모두에게 돌아가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편집자 주



파가니니,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Paganini, Sonata for Violin and Guitar, Op.3 (No.6)


파리 주재원 시절 거래처 초청으로 제노바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6번째로 큰 도시이자 제1의 항구인 제노바는 중세 시기엔 베네치아와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번창한 무역 중심지였지만 이탈리아 여행지로 우선순위에 놓일 만큼 유명하질 않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식당에서 점심 식사 중 거래처 사장이 혹시 파가니니를 아느냐고 물어왔다. 아주 좋아한다고 답하자, 기뻐하면서 구도심에 있는 박물관 투르시 궁으로 안내했다. 놀랍게도 파가니니가 생전에 연주했던 바이올린이 전시되어 있었다. 1743년 과르네리가 제작한 명기名器로, 파가니니가 ‘캐논(Cannon)’이라고 부르며 가장 아꼈던 바이올린이다. 파가니니 콩쿠르 우승자에게만 연주 기회가 주어지는 보물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던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는 파가니니가 아끼던 바이올린을 볼 수 있다


1782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1782~1840)는 항구 노동자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인 부친으로부터 5세 무렵에 바이올린을 배웠다. 천재성과 노력을 겸비해 10대 초반에 기존의 바이올린 기법들을 모두 익혔고, 15세 무렵에는 독창적인 연주 기법을 개발해 나가며 직접 작곡한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교의 명연주로 10대 후반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파가니니는 어린 나이에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었으나, 한때 방탕한 생활과 도박으로 아끼는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맡겨 돈을 빌리기도 했다. 20세가 되기 전, 연상의 귀부인과 사랑에 빠져 동거생활에 들어가 연주 활동을 하지 않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 3년간 기타를 좋아하는 연인을 위해 많은 기타 곡들을 작곡하는 한편, 바이올린의 새로운 연주 기법을 연구하면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1804년(22세) 동거생활을 청산한 후 고향 제노바로 돌아온 파가니니가 연주 활동을 재개하자 이탈리아 청중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으며, 이후 20년 이상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프리랜서 바이올리니스트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그 명성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퍼져나갔다. 1828년(46세)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첫 해외 연주회에서 대성공을 거둔 후 독일,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약 5년간 성공적인 연주 활동을 한 후 1832년(50세)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 후 선천적인 지병과 매독 후유증 그리고 연주 여행 후 피로감으로 인해 급속도로 쇠약해진 몸을 다시 일으키지 못한 채 1840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이탈리아 파르마Parma의 파가니니 오디토리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수많은 기록이 남아있어 유추해볼 수 있다. 바이올린 하나로 오케스트라 소리를 모방하고, 각종 동물의 울음소리를 재현했으며, 스타카토staccato (음을 하나하나 짧게 끊어서 연주하는 기법), 피치카토pizzicato (활 대신 손가락으로 퉁겨 연주하는 주법) 등의 현악기 테크닉 모두 파가니니가 개발해 낸 연주 기법이었다. 파가니니의 연주를 직접 들은 20세 청년 프란츠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라는 말을 남겼고, 로시니는 일생에서 단 세 번 울었다고 고백하면서, “한번은 자신의 오페라가 실패했을 때, 두 번째는 소풍 가서 구운 칠면조를 강에 빠뜨렸을 때, 그리고 세 번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파가니니의 초인적인 기교는 그의 기행과 매부리코의 기묘한 용모와 결합해 ‘악마의 바이올린’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얻어낸 연주 실력이라고 믿었다.


1840년 5월 27일, 한 성직자가 프랑스 니스에서 임종을 앞둔 파가니니를 찾아 왔다. 그의 목적은 악마와 결탁했다고 소문이 나 있던 파가니니로부터 직접 고백을 듣고자 함이었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그 사제는 죽어가는 파가니니에게서 “내 바이올린 속에는 악마가 숨어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고, 그 증언을 니스의 주교에게 전했다. 이로 인해 고향인 제노바에 묻히고 싶다는 파가니니의 유언은 실행되지 못하고 시신은 방부 처리된 상태로 수년간 한 후원자 소유의 섬 동굴에 숨겨져 있었다. 사후 4년이 지난 후 그의 시신은 니스를 떠나 제노바에 도착했으나, 교회 측의 반대로 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채 납골당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사망한 지 36년이 지난 1876년에서야 ‘악마’의 오명을 벗은 파가니니는 마침내 교회 묘지에 묻혀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파가니니의 이름을 딴 장미 '니콜라 파가니니'


알고보면 파가니니는 우리에게 생각보다 친숙한 음악가이다. 1995년 그야말로 열풍을 불러일으킨 드라마 ‘모래시계’와 관련이 있다. 평균 시청률이 50%에 육박했다는 기록이 있고, 나 같은 직장인들이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야근이나 회식을 피하면서 서울 시내 밤거리가 한산했었다고 전해지며, 모래시계에 빗대어 ‘귀가시계’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테마곡 ‘혜린의 테마’ 원곡이 바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12번’이었다. 20년 이상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어온 내게도 생소한 작품이 드라마를 통해 유명해지면서 수시로 라디오나 TV를 통해 흘러나왔고, 그 영향으로 ‘Paganini for two’라는 타이틀로 발매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작품집은 한 때 가장 많이 판매된 CD로 기록되기도 했다.


파가니니가 남긴 134개의 작품 중 77곡에 기타가 포함되어 있다. 기타 독주곡, 만돌린과 기타를 위한 이중주,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이중주, 그리고 기타가 포함된 현악 사중주 등 다양하다. 그중 가장 많이 연주되고 사랑받는 곡은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이중주 곡들이다. 30여 곡에 달하는 모두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가득 담겨있다.


일반적으로 ‘바이올린 소나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조합의 이중주로 연주하도록 작곡된 작품들을 의미하나, 파가니니는 피아노 대신 기타와 함께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창조했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과 함께 기타를 배웠던 파가니니는 강렬한 음색의 바이올린, 그리고 음량은 작지만 여러 음을 한 번에 낼 수 있어 반주 악기로 최적인 기타를 결합해 이질적인 현악기 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비록 파가니니의 대표작인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나타나는 비르투오소virtuoso (연주 실력이 매우 뛰어난 대가)적인 마력이나 긴장감은 덜하나, 애잔하고 서정적이며 때로는 경쾌한 느낌의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들은 이른 아침이나 늦음 밤 가릴 것 없이 언제 들어봐도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잠시나마 일상의 번거로움을 잊게 해 준다.




♪ 음악 들어보기


파가니니,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12번 Op.3, No.6 (1악장)



파가니니,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12번 Op.3, No.6 (전곡, 1, 2악장)



파가니니,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집 (14곡)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