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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2-05-12

유년의 자리, 흑백 풍경의 노스탤지어 <벨파스트> (2021)



행복과 비극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건 어찌 보면 유년기에나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어른이 되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이란 행복을 확연히 줄어든 것처럼 느끼게 하니까. 이번 작품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각자의 유년기를 떠올리게 한다. 과연 지금의 우리는 그때보다 얼마나 더 불행하고, 또 행복해졌을까.



<벨파스트>는 1960년대 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살고 있는 버디(주드 힐)의 유년 시절을 담은 영화이다.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홉 살 소년 버디의 일상은 신나는 모험 그 자체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 옆에 앉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해맑은 소년 버디. 때로는 동네 누나의 꾐에 빠져 과자 도둑이 되기도 하고 골목에서 소리 내어 역할 놀이를 하는 등, 평범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낸다. 이런 버디의 삶에 큰 사건 하나가 놓이게 되는데 바로 빈번하게 벌어지는 벨파스트 내 폭력 사태이다. 이곳 벨파스트는 언제부터인가 천주교를 탄압하려는 개신교의 폭력으로 인해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다. 당시 천주교 중심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아일랜드에 개신교가 들어오게 되면서 기득권 세력이 된 개신교도들이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기에 벨파스트의 사람들은 폭력행사를 권유받거나 혹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버디는 역사의 비극 한 가운데에 놓여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린이에게 허락된 다양한 세상의 재미를 경험하며 무럭무럭 자라난다. 좋아하는 여자아기가 천주교도이기 때문에 본인도 천주교의 방식을 따라야 할지 고민하는 이 소년의 귀여운 성장극은, 아일랜드 종교분쟁으로 위태로워진 이 도시의 비극의 무게 못지않은 중요한 서사가 된다. 바로 한 인간의 역사로서 말이다.



영화 <벨파스트>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

2022년 아카데미 각본상, 골든 글로브 각본상,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전문가이자 연극연출가, 배우, 영화감독으로 무궁무진한 활약을 보여주는 케네스 브래너의 최신작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와 <테넷>을 통해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나 <오리엔트 특급살인>, <나일강의 죽음> 등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품격 있는 비주얼 터치로 완성했던 그의 연출 이력을 생각하면, 한 소년의 유년기가 차기작으로 선정된 것은 예상 밖의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그는 ‘코로나 시국 속에 우리 인생이 가진 강력한 불확실성의 단면을 마주했다. 그러기에 더더욱 위로와 향수의 시간인 유년의 시절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빈번한 폭력 사태로 불안에 떨어야 했던 아홉 살의 벨파스트로 말이다. 실제 감독은 아홉 살 때 이곳에서 이주하였고, 2011년이 되어서야 다시 벨파스트를 찾았다고 한다.

극 중 버디는 감독 유년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케네스 브래너 본인의 기억에 대부분 의지하여 완성한 그의 노스탤지어이다. 그 시절의 정서와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주요 배우들을 북아일랜드 출신 배우로 캐스팅 한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아빠 역의 제이미 도넌, 엄마 역의 케이트리오나 발피, 할아버지 역의 시아란 힌즈가 그렇다. 버디의 일상을 감싸는 영화의 사운드트랙 역시 벨파스트 출신 뮤지션인 밴 모리슨의 작품이다. 300:1의 경쟁률을 뚫고 버디 역에 캐스팅된 주드 힐은 그 시절 동네 골목에서 한 번쯤 보았을 꾸러기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지녔다. 개구쟁이들은 세계 각국 어디에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짙은 주근깨, 벌어진 앞니로 환하게 웃던 내 유년의 기억 너머 어딘가에서 뛰어노는 꼬마 악동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우리의 공통적인 유년기처럼 주인공 '버디'는 장난꾸러기의 존재를 대표하는 듯한 모습이다. 출처: 네이버영화


비극 속에서도 찬란한 유년의 기억

<벨파스트>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비극과 행복의 기억이 영화 서사 내에 비슷한 무게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감각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동네 어귀, 버디와 친구들을 둘러싼 정겨운 소리들은 어느 순간 폭력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치환되어 있다. 왁자지껄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거친 목소리로 오버랩 되고, 아이들의 칼싸움 놀이는 어른들의 테러로 이어진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감각은 오히려 영화적이며 비현실에 가깝다. 같은 선상에 놓여있는 이 비극과 행복은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는 날것의 현실 그 자체일 것이다. 그 한 가운데에 버디와 개신교도인 버디의 가족이 있다. 개신교 동료들은 매번 버디의 아빠에게 그들의 대의에 합류하기를 권유하지만, 그는 어느 쪽도 아닌 런던으로 떠날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아마 익숙한 영화서사라면 버디의 아빠는 폭력에 합류하거나 맞서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현실적인 이들의 상황은 당시 세계가 통과하고 있었던 냉전 시기의 단면을 제시한다. 극 중 달을 향해 로켓을 쏘아 올리는 방송의 한 장면은 열강 간의 이념적 갈등이나 종교분쟁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들은 흑과 백, 즉 흑백 논리 사이에 갇힌 수많은 회색 빛이 되어있다. 그 잿빛 정서는 그날 그곳 ‘벨파스트’ 뿐만 아니라, 흑백을 이용한 이 영화의 표현방식으로 존재한다. 색채가 사라지고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과 포착.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러나 극 중 놀라운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버디가 영화를 보는 장면이다. 어두운 극장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버디의 세계는 흑백의 세계에서 총천연색의 세계로 변화한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환희에 찬 장면으로 기억된다. 흑백 논리가 지배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순수한 동심의 세계는 이 모든 것들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비극 속에서도 하루하루 신기한 만남과 모험을 경험하는 평행세계, 이 유년의 시간은 어른들은 볼 수 없는 유토피아이다. 그러기에 어른으로 불리는 이들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유년의 세계를 소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영화는 주로 어린아이의 낮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쇼트가 자주 등장한다. 인상적인 것은 버디의 눈에 항상 거대하게 등장하는, 영웅적인 아빠의 모습이다. 비록 현실은 경마에 돈을 탕진하고 이자를 갚지 못해 아내 속만 썩이는 대책 없는 어른이지만 말이다. 



어린시절 아빠는 대개 영웅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떠나는 이들과 남아있는 이들

버디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불현듯 나의 유년이 떠오른다. 그 시기 함께 고무줄놀이 하던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에게 부끄러움이 뭔지 알려준 선생님과 매번 만날 때마다 나를 괴롭히던 그렇게나 밉상이던 남자아이는. 나는 오래도록 마을에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그곳을 떠났다. 마치 버디의 가족처럼 말이다.

영화는 떠나는 버디의 가족 위로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그리고 행방불명된 모든 이들을 위해’라는 자막을 띄우며 흑백에서 컬러로 변신한 지금의 벨파스트를 훑는다. 실제 벨파스트 협정이 있던 98년까지 사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숨졌다고 보고된다. 어른이 된 지금, 동화 같은 유년은 노스탤지어로 기억되지만, 비극은 여전히 상흔이 되어 남아있다. 그날 그곳 벨파스트를 떠난 이들, 비극의 한복판에 서 있던 이들 그리고, 남아있는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장다나 영화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