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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에덴클래식 #16 나다움을 찾게 하는 클래식



삶은 누군가에게 보여짐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돌아봐야 할 때가 있다. 망설임과 두려움 없이 가장 나다움을 잊지 않기 위해. 우선, 이 곡에 마음을 맡기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피아졸라, 누에보 탱고 Piazzolla, Nuevo Tango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성격이 괴팍해진 퇴역 군인 프랭크. 삶에 대한 희망을 접고 고등학생인 찰리를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해 뉴욕으로 자살 여행을 떠나지만, 소신 있고 정의로운 학생과 함께 지내면서 점차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알 파치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여인의 향기’의 간략한 줄거리다.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찰리가 관심을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다가가 합석을 요구하고 탱고를 함께 추자고 제안하는 프랭크, 실수할 것 같아 걱정된다는 그 여인에게 말한다. “인생과 달리 탱고에 실수라는 건 없지요. 간단해요. 그게 바로 탱고가 멋지다는 겁니다. 실수하면 스텝이 엉키게 되지만 그냥 계속 추면 됩니다.” 불과 5분 정도의 짧은 이 장면은 영화의 백미이자 영화의 주제를 함축시킨 듯하다.




소리를 매개로 하는 시간적 예술인 음악, 시각적이며 공간적 예술인 미술은 각각 독자적인 영역으로 발전해 왔지만, 육체로 표현하는 춤은 거의 절대적으로 음악이 있어야 했다. 이렇듯 춤을 추기 위한 목적으로 부수적으로 만들어지는 춤곡들은 점차 위대한 음악가들의 손을 거쳐 서양음악의 중요한 장르로 발전해갔다. 프랑스 춤곡 미뉴에트는 바로크 시대의 모음곡이나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고전주의 음악가들의 교향곡에 사용되면서 기악곡의 중요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고, 독일, 오스트리아의 춤곡인 왈츠는 요한 슈트라우스, 쇼팽 등에 의해 부수음악이 아닌 독립적인 기악곡으로 발전했다. 이외에도 가보트, 마주르카, 폴카, 폴로네즈, 하바네라 등 많은 기악곡이 춤곡에서 유래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한 탱고도 춤을 위한 반주 음악이 아닌 독립적인 기악곡으로 인기를 끌면서 많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의 선술집에서 이민자들에 의해 시작된 탱고는 쿠바의 춤곡 하바네라의 우아함에 흑인들이 해방을 꿈꾸며 추었던 축제 음악 칸돔베의 리듬이 더해져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 춤곡이다. 19세기 중반 무렵엔 바이올린과 기타 플루트 등으로 연주되었지만 20세기에 접어들어 반도네온과 바이올린,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등의 악기들이 추가되어 탱고 특유의 애절함과 리듬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탱고 작곡가이자 가수인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1890~1935)은 1917년 탱고 창법으로 노래한 음반을 발표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탱고의 예술성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탱고가 춤을 추기 위한 보조 음악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 삽입되어 유명해진 ‘Por una Cabeza(간발의 차이로)’는 카를로스 가르델이 작곡하고 노래한 탱고 음악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 아스트로 피아졸라에 의해 탱고는 한 시대에 유행하고 사라져버리는 대중음악이 아니라 인류 유산으로 오래 남을 고전음악으로 변모해갔다.



출처: 네이버영화


휴양도시 마르델플라타Mar del Plata에서 태어난 아스트로 피아졸라Astro Piazzolla(1921~1992)는 어려서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8세부터 부친에게 물려받은 반도네온을 연주하기 시작하여 11세에는 첫 탱고 음악을 작곡했고, 12세에 피아노를 배우고, 바흐의 음악을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는 등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4년(13세)에 미국에서 활동 중인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나 인정을 받은 피아졸라는 그가 제작한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1935년엔 가르델의 연주 여행에 반도네온 주자로 함께 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부친이 반대해 성사되지는 않았는데, 그 여행 중에 가르델과 그의 악단 멤버들이 모두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훗날 그 시절을 회상하며 피아졸라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내가 그 여행을 가겠다고 고집해 아버지가 허락했다면 나는 지금 반도네온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을 것이다.”


1936년(15세)에 고국으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름난 탱고 악단에 들어가 반도네온 주자나 피아노 연주가로 활동하며 재능을 나타냈으나 만족해하진 않았다. 그의 꿈은 클래식 음악가로 향해 있었다. 1941년(20세)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찾아가 자신의 피아노곡을 평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재능을 알아본 루빈스타인은 피아졸라를 아르헨티나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와 피아니스트에게 소개해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 수업을 받도록 했다. 1943년(22세)에 첫 클래식 실내악 작품을 발표하는 등 점차 기존의 탱고 음악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피아졸라는 버르토크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연구하고, 관현악 지휘법을 공부하면서 클래식 음악가의 길을 밟아나갔다. 1953년(32세) 클래식 음악 연주회에서 발표한 곡 ‘3악장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향곡’에 반도네온을 사용해 청중들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했으나, 이 작품을 계기로 프랑스의 저명한 음악교육자이자 작곡가들의 스승으로 불리던 나디아 불랑제의 초청을 받아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이 부분은 버르토크 같고,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그런데 피아졸라는 안 보인다.” 그녀는 혹평했다. 수준이 낮은 탱고 음악을 만들고 반도네온을 연주해 왔던 과거가 부끄러워 숨겼던 피아졸라는 결국 스승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그녀 앞에서 탱고 작품들을 연주했다. 불랑제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게 바로 피아졸라야!” 그 이후 피아졸라는 새로 탄생했다. 1년 반 동안 대위법 등 클래식 작곡법을 배운 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해 기존의 탱고와는 다른 스타일의 혁신적인 탱고 음악을 선보였다. 성악을 제외하고 재즈를 도입했으며, 시끄러운 선술집이나 카바레에서 연주하는 탱고가 아닌 예술성이 있는 감상용 탱고 음악을 발표했다. ‘Nuevo Tango(새로운 탱고)’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피아졸라는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음악가로 칭송받았으며, ‘누에보 탱고’는 클래식 음악 연주가들이 즐겨 연주하는 고전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피아졸라가 196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킨테토 누에보 탱고(Quinteto Nuevo Tango, 탱고 5중주단)’를 결성한 후 발표한 작품부터 ‘누에보 탱고’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 3곡을 들어본다.



 음악 들어 보기


피아졸라, 누에보 탱고 Piazzolla, Nuevo Tango


-Adios Nonino (안녕, 아버지) 1960년

1959년 미국에서 체류하던 시절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비통한 심정으로 작곡한 곡이다. 미국에서의 연주 여행이 실패해 경제적으로 곤궁하던 시절이라 슬픔은 더했으리라 생각된다. 탱고 특유의 격정적인 리듬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선율이 교차하면서 전반적으로 슬픈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우아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Nonino'는 아버지의 애칭이다. 피아졸라가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꼽았을 정도로 사랑한 곡이며, 2014년 러시아 소치올림픽에서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쓰여 우리나라 국민에게도 아주 친숙한 음악이 되었다.




-Libertango (리베르탱고) 1974년
피아졸라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곡으로 누에보 탱고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강렬한 선율과 애수가 깃든 주제가 어울려 정열과 슬픔의 이미지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작품으로 ‘자유로운 탱고’라는 제목과 같이 다양하게 편곡 연주된다. 피아졸라는 연주용 음악으로 작곡했으나 탱고 춤의 반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곡이기도 하다.




-Oblivion (망각) 1984년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망각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의 생명에는 망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혀 잊는 것뿐이다.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다.” 이 작품을 두고 피아졸라 자신이 남긴 말이다. 망각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인생의 단면을 애절하게 표현해낸다. 1984년 영화 <엔리코 4세>의 OST로 사용된 작품으로 피아졸라가 직접 반도네온을 연주, 녹음했다.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