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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2-04-20

현실 속 비현실




자연, 그리고 인류에 대한 관심이 작품 전반에 흐르는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대작들이 서울을 찾았다. 아모레퍼시픽뮤지엄에서 열리는 거스키의 개인전(~8. 14)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욕구와 본질.



현대미술이나 사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이름을 한번 즈음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1955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뒤셀도르프에서 자란 거스키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사진가였던 적분에 일찌감치 사진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에센 폴크방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1980년대 초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유형학파의 대부라 불리는 베허 부부를 만나 독일 유형학 사진을 길로 들어섰다. 유형학이란 피사체를 오롯이 물질적인 특징에 따라 분류하고, 분류 결과를 고찰하는 방법론이다. 그는 이러한 유형학적 관점에서 다양한 사업화의 결과물을 주제로 한 사진 작품으로 유명해졌고, 40여 년의 작품 활동을 통해 그는 시대의 감성과 정신을 날카롭게 포착하며 현대 사진의 새로운 역사를 이 시간에도 써내려 가고 있다.


200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어진 순회전을 비롯해 퐁피두 센터(2002), 시카고 현대미술관(2002),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2003), 하우스 데어 쿤스트(2007), 빅토리아 국립미술관(2008),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2012), 헤이워드 갤러리(2018)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진 그는 이번 전시에서는 <파리, 몽파르나스>(1993), <99센트>(1999, 리마스터 2009)와 같은 대표작을 포함해 1980년대 중반 초기작부터 코로나 시대에 제작된 2022년 신작까지 총 40점의 작품을 서울 관객에서 선보이고 있다. 관객들은 ‘조작된 이미지’, ‘미술사 참조’, ‘숭고한 열망’ 등 큰 주제들로 구성된 총 일곱 개의 전시실을 유영하듯 이동하며 대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7점의 작품을 중심으로 안드레아스 거스키 사진 속 유형학적 요소를 파악해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얼음 위를 걷는 사람 Eisläufer>, 2021,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이번 전시에 거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스키 코스의 엄청난 경사를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 평면으로 보여주는 작품 <스트레이프>(2022)를 비롯해 신작 두 점을 선보이는 데 <얼음 위를 걷는 사람>(2021)이 바로 그것이다. 피터 브뤼겔 풍의 고전적인 주제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 속 장소는 뒤셀도르프 근처의 라인강변 목초지다. 얼음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범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사이의 간격이 일정 간격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곳에서도 ‘코로나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었던 것. 거리두기로 인해 분산된 인파의 모습은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규범에 얽매여 있는 코로나 시대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마존 Amazon>, 2016,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라인강 III Rhein III>, 2018,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작가는 필름 카메라로 촬영된 사진을 컴퓨터로 스캔해 편집하는 ‘디지털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을 도입해 작품을 완성한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위치한 아마존 물류센터를 촬영한 <아마존>(2016)은 사물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평면성, 정면성을 기본으로 하는 유형학적 사진의 기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선반에 빼곡히 들어찬 상품들을 모두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디테일과 압도적인 크기가 인상적. 작가는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와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감소된 ‘시지각’의 역할을 보여주기 위해 각각의 선반을 따로 찍은 후 디지털로 합성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소비 지상주의의 핵심과 자본주의의 폐해를 암시적으로 드러낸 이 작품을 보며, 어떤 부분이 과연 진짜이고, 합성된 부분인지 구분해 내는 것도 감상 포인트가 되겠다.

흐르는 강물에 집중한 2018년작 <라인강 III>(2018)은 거스키의 유명한 1999년작 <라인강 II>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작품. 두 사진 모두 여름에 촬영했으며 배경과 구성은 사실상 거의 동일하지만 이 작품이 좀 더 잿빛의 황량한 풍경이다. 2018년 당시 라인강은 가뭄으로 인해 강 수위가 최저 수준으로 내려갔고 동식물이 살기에 가혹한 환경이 되었는데, 거스키의 이 작품은 라인강, 아니 인류의 현실을 반영한 디스토피아적 작품이라고 하겠다.



<평양 VI Pyongyang VI 2017> (2007),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무제 XIX Ohne Titel XIX>, 2015,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추상 회화나 미니멀리즘 조각의 특성을 더한 거스키의 실험적인 작업은 기존의 정형화된 사진 예술의 틀을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작가는 현대 사회와 경제의 축소판을 군집의 형태로 보여주는 장소들을 촬영해 도시의 스펙터클한 모습을 담아왔는데, 2007년 작가가 직접 평양에 방문해 촬영한 <평양>(2007)연작은 북한에서 규모가 가장 큰 행사인 아리랑 축제에서 진행된 매스 게임 장면을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심플한 디자인같이 보이지만,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무려 100만 명이 넘는 공연자가 이루어 내는 시각적 장관이 무척이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거스키가 촬영하는 자연 풍경, 또는 환경 사진들은 관객을 압도하는 것이 공통점인데, 수백만 송이의 튤립으로 가득찬 들판의 모습을 구성하는 세세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무제 XIX Ohne Titel XIX>(2015)가 대표적이다. 이 촬영을 위해 작가는 헬리콥터를 타고 먼 거리에서 튤립 밭을 촬영하고 이를 완벽한 수평적 구성으로 만들어내며 기하적 추상을 완성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컬러 스트라이프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튤립 하나하나는 작지만 그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 더욱 놀랍다. 튤립이라는 완벽한 물질이 거스키의 사진 안에서 완전한 추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거스키의 사진이다.



<크루즈 Kreuzfahrt>, 2020,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F1 피트 스톱 I F1 Boxenstopp I2007, ©안드레아스 거스키, 스푸르스 마거스 제공


마지막으로, 인류와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대규모 작품들을 선보이며 사진의 확장적 가능성을 다방면으로 실험해 온 거스키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두 작품을 소개한다. 촬영한 이미지들을 조합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거스키는 특히 공장이나 아파트와 같이 현대 문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를 포착해 거대한 사회 속 개인의 존재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데,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크루즈>(2020). 거스키는 여객선 ‘노르웨이 블리스’를 여러 단계에 걸쳐 촬영한 후 이들을 디지털 기술로 조합해 새로운 배를 창조했다. 거스키가 이 배에 명명한 이름은 바로 ‘노르웨이 랩소디‘. 일정한 크기의 창문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구조는 전체와 세부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각각의 창문들은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서사를 상징한다.

<F1 피트 스톱 I F1 Boxenstopp I>(2007)은 이번 전시 출품작 중 가장 긴 작품. F1 경기 시작 전 두 팀이 한창 정비 중인 순간을 포착한 작품인데, 멀리서 보면 마치 무대 위 댄서들의 우아한 움직임처럼 보인다. 경주차와 선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정비사들이 작업하고 있는 과장된 모습을 두 폭의 그림과 같은 단순한 구도 안에 담아내 드라마틱한 효과를 창조한 것이 매우 인상적으로 작가는 경기의 주인공인 차량에 집중된 군중의 시선을 통해 군중의 심리를 탐구하고 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이번 회고전은 현대 사진 예술에 큰 족적을 남긴 거스키의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모든 것이 점점 더 이미지화 되는 시대. 거스키의 작품을 통해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물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듯 싶다. 

김이신 <아트 나우> 편집장

<아트 나우> 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