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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30

에덴클래식 #15 화합을 위한 클래식



‘모든 인간은 한 형제’. 쉴러의 시 <환희의 찬가>를 인용한 베토벤의 아홉 번 째 교향곡. 그가 꿈꾸던 세계는 지금 어디쯤 왔을까. 교향곡 <합창>은 어느 때보다 화합이 필요한 시기에 ‘환희’ 속에서 하나 되는 인류의 모습을 그리며 들어 볼 만한 곡이다.



베토벤 : 교향곡 9번 ’합창’ Beethoven :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Choral”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당신의 부드러운 날개가 있는 곳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여 서로 얼싸안아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아라.”

-합창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 중 일부


교향곡에 인간의 목소리를 담아 인류의 사랑과 환희를 부르짖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은 송년음악회 고정 레퍼토리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12월 중순 무렵이면 합창교향곡 연주회가 열린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콘서트가 취소되었던 작년에도 서울시향의 공연은 진행되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공연 예매를 하려고 했을 땐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몇몇 지인과 모여 대형 스크린으로 스피커 볼륨을 한껏 올린 채 합창교향곡을 감상했다. 실연에서 경험하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리카르도 무티의 시카고 심포니가 들려주는 멋진 화음은 충분히 송년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지난 2월 말경 시작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의 전쟁은 애초 예상과 달리 한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잘 모르겠으나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 마침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홀 무대에 오른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는 이례적으로 지휘봉 대신 마이크를 잡고 청중 앞에 섰다.

“무대 위에서 우리는 정치적 언사를 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위해서 음악을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환희와 인류애를 노래하는 이 음악을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떠올리지 않고선 연주할 수 없습니다.”




1824년 5월 7일, 서양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오스트리아 빈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8번 교향곡을 작곡한 지 12년 만에 새로운 교향곡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당시 빈에서는 막 30대에 접어든 로시니의 오페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베토벤은 이러한 빈의 음악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교향곡에 대한 빈 청중들의 반응에 확신이 없었던 베토벤은 초연 장소를 베를린으로 계획했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청원서를 보내 빈에서 초연해 주길 강력히 희망했고, 결국 베토벤은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우려와는 달리 이 역사적인 초연은 공연장 입석까지 꽉 찰 정도로 빈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다.작곡가가 지휘봉을 잡는 당시 관례에 따라 베토벤도 지휘대에 올랐으나 연주자들은 또 다른 지휘자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은 악보를 읽어가며 연주에 맞추어 지휘봉을 흔들고는 있었지만, 연주자들은 그의 지휘봉을 볼 여유가 없었다. 70여 분에 달하는 이 위대한 작품 공연이 끝났을 때, 관중들은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으나 베토벤은 그 소리조차도 들을 수 없었다. 알토 독창자가 그에게 다가와 청중들을 향해 돌려세웠고, 그때에야 비로소 작곡가로서의 최고의 순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번’은 이전의 교향곡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전통적인 4개의 악장 구조이지만 이례적으로 느리고 서정적인 악장을 2악장이 아닌 3악장에 배치했다. 총 연주 시간이 70분이 넘는 대곡으로 기존 8개 교향곡 길이의 두 배 정도로 늘었고, 교향곡 역사상 처음으로 성악을 도입했다. 내용 면으로는 더욱 다른 작품들과 구별된다. 1악장(약 17분), 2악장(약 16분), 3악장(약 16분)도 장대한 구성이지만, 이 3개의 악장은 결국 ‘환희’를 노래하는 피날레 4악장을 위한 서주序奏에 불과하다. 인간이 지닌 숙명적인 고뇌의 심정을 그려낸 1악장, 그 고뇌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농담조로 혹은 치열함으로 대체시켜버린 2악장, 명상적인 주제로 안정과 평화, 때로는 숭고한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3악장... 이렇게 50여 분가량의 긴 여정이 끝난 후 클라이맥스 4악장으로 넘어간다.


혼란스럽고 다소 격한 팡파르 풍으로 4악장은 시작된다. 중간에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격한 감정을 말리는 듯 호소력 있게 끼어든다. 이어 1악장, 2악장, 3악장의 주제선율이 제시되고 그 선율들은 인간의 목소리를 닮은 악기, 첼로들에 의해 하나씩 부정된다. 베토벤이 음악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1악장의 ‘고뇌 혹은 투쟁’이 아니며, 2악장의 ‘욕망, 열광’도 아니다. 심지어 3악장의 ‘안정, 숭고함’도 아니다. 3분 정도의 혼란스러운 서주 부분이 끝나면 클라리넷을 비롯한 목관악기가 새로운 선율을 제시한다. ‘환희의 선율’이 짧게 모습을 드러내자 이 선율에 대해서도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강하게 반응한다. 이젠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이어 아주 조용히 첼로와 더블베이스를 통해 ‘환희의 주제’가 본격적으로 제시되고, 점차 바이올린과 관악기들도 합세해 이 단순하고 익숙한 멜로디는 힘을 얻는다.


그렇지만 관현악만으로는 아무래도 호소력이 떨어진다. 갑자기 첫 부분의 혼란스러운 팡파르가 다시 짧게 나타난 후 바리톤이 힘찬 목소리로 외친다. “오, 벗이여! 이런 음악이 아니라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릅시다. 좀 더 환희에 찬 노래를!”이어 주제선율로 쉴러의 ‘환희에의 송가’를 노래하면서 합창단과 다른 독창자들을 끌어들인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찬란한 빛, 낙원의 딸이여. 우리는 불꽃의 정열에 도취해 그대의 천상의 성역에 도달하리라. 그대의 신비로운 매력은 관습이 갈라놓은 것들을 다시 결합시키고 모든 인간은 그대의 아늑한 날개 아래 형제가 된다.” (쉴러 ‘환희에의 송가’ 1절)

쉴러의 송가 2절부터 4절까지는 독창과 중창 그리고 합창이 어우러져 다양한 변주 형태로 이어지면서 점점 분위기가 고조된다. 그러다 잠시 숨을 고른다. 성악이 멈추고 관현악단이 프레스토의 빠르기로 질주하듯 내닫는다. 4악장 중간의 일종의 간주곡 성격이다.




3분가량의 관현악 연주가 잠잠해지고,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부드러운 호른과 오보에의 유도 선율에 의해 마치 어둠 속에서 섬광이 비치듯 거룩하고 힘찬 합창이 울려 퍼진다. 쉴러의 송가 1절이 환희의 선율을 타고 다시 나타나는 이 부분은 비단 9번 교향곡에서만이 아니라 베토벤의 전 작품 중에서 가장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이다. 이 감동은 송가 5절과 6절로 이어지고 12분 동안 지속되는 합창은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쉴러의 화합의 메시지를 흥분과 감동의 선율로 노래하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다가 장대하고 엄숙하게 끝을 맺는다.


합창교향곡이 초연된 날로부터 3년 후 베토벤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교향곡들은 후대 작곡가들에겐 감히 넘지 못할 커다란 벽으로 남았다. 베토벤의 음악에 심취했던 바그너는 “교향곡을 쓸 권리는 베토벤에 의해 소멸되었다.”라는 말을 남긴 후 극음악에 전념했다고 한다. 낭만주의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 브루크너나 브람스의 교향곡들이 베토벤의 작품을 계승할만한 명곡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결코 능가하거나 필적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대한 구성과 심오한 사상을 담아낸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중 몇 곡이 견줄 만하리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만의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 음악 들어보기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Beethoven,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Choral’)


-Riccardo Muti, Chicago Symphony Orchestra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