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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주관적인 경험에 의지해 전적으로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구든 언제라도 아픔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한층 더 가까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예술로써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 이근민의 세계를 만나보자.
2001년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은 이근민 작가의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가 5월 18일까지 마곡에 위치한 ‘스페이스 K’에서 열린다. 정신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환각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 그의 작품에선 고통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가 굳건히 드러난다.
헤르난 바스, 라이언 갠더, 네오 라우흐와 로사 로이 개인전. 그간 스페이스K서울에서 열린 이들의 전시에 비해 지난 2월 28일 막을 올린 1982년 생 이근민 작가의 전시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글로벌 미술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작가도 아닐 뿐더러 우리에겐 여전히 생소한 ‘경계성 인격 장애’를 모티브로 작업하기에 대중들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경력을 들춰 보면 그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난데없는 작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2009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지금껏 총 아홉번의 개인전과 열 번의 단체전을 가진 이근민은 해외 레지던시에도 참여했고, 2015년 미국의 미술 전문지 <아트 포럼>과 2019년 <아트 인 아메리카>에 작품이 소개되면서 해외에 이름을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번 전시만큼 큰 규모는 처음이기 때문. 스페이스 K 서울 개관 후 국내 작가로는 첫 개인전인 이근민의 전시에선 자신의 병리적 경험을 바탕으로 가공되지 않은 환각을 예술적으로 구현한 회화와 드로잉 31점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드로잉과 회화 등 총 31점의 작품은 ‘이근민의 처절한 마음의 풍경‘으로 일축된다.
Refining Hallucinations (환각 다듬기)_Ink on Paper_29.7 x 21 cm, 2021
이근민 작가는 2011년 경계성 인격 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 징후는 초등학교 때부터 간헐적으로 나타났는데 시체 썩는 냄새를 맡는다거나, 구토로 인해 음식물을 일정 기간 먹을 수 없는 증상 같은 것이었다. 치료와 학업을 병행하며 대학생이 되었는데, 증세가 더욱 심해지면서 의사로부터 정신질환 판정을 받고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이때 병상에서 겪은 환각 증세와 사회적 시선은 작가 자신을 옥죄는 고통이었고, 추후 그의 작업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작가가 자신의 병리적 경험을 화폭에 본격적으로 담기 시작한 건 2010년 전후지만 사실 신경증, 정신분열증의 중간 즈음에 해당하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진단 받기 전부터 현대사회에서 자행되는 ‘정의하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권력자들이 현대 문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자행해 온 약자에 대한 규정에 대해 오랜 반감을 가져오던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경계성 인격장애를 경험하면서 이것을 어떻게 이미지화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본격적으로 작품에 소재화시키기 시작한 것. 작가는 병을 진단받는 과정에서 신경정신과 의사가 내린 진단명 및 이를 표기한 진단번호가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강압적인 폭력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상처 가득한 육신에서 흘러나온 피의 세포분열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진 신체부분을 형상화환 ‘다친 바보‘(2021), 분노에서 시작해 자책으로 끝나는 피해망상의 단계적 과정을 연작의 형식으로 담고 있는 ‘피해망상의 배열’ (2021), 그리고 기억과 상처의 퇴적물이 거대한 구름 덩어이를 이루고 다시 그 사이에서 생겨난 기생체가 기억을 빨아먹으며 번식하는 풍경을 담은 10미터 길이의 ‘문제구름’ (2021)에서 관객들은 파편화된 신체와 장기, 쉽사리 파악되지 않은 은유적 형상들을 보며 작가가 앓는 병적 고통과 진단이 가져온 억압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볼 수 있다.
'Matter Cloud(문제구름)' 앞에 선 이근민 작가. Matter Cloud (문제구름)_Oil 00,on Canvas_248.5 x 999 cm, 2021
작가는 경계성 인격장애 중에서도 환시와 같은 시각 이미지와 한후와 같은 후각 이미지를 겪었다.
그러한 환각 경험은 작가의 작업 세계, 작업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이근민 작가가 개인전 경험에만 의지해 작품을 하는 건 아니다. 자기 표출을 넘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저항으로도 발전하는 것. 자신에게 내려진 병명에 대한 진단 코드를 은유한 작품 ‘설계도‘(2021)는 환자에게 통보 외에는 아무런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의료 진단서를 무용지물로 치부하는 작품이다. 소통 불가의 상황을 일방적인 배설물로 묘사한 작품 ‘구두 소통‘(2021)도 같은 맥락. 환자가 느끼는 피해 망상의 극심한 고통이 종국에는 하나의 건조한 기록물로 밖에는 남져지지 못하는 공허함을 표출한 것이다. ‘수술‘(2021)에서는 해제된 인체를 흙덩이처럼 마구잡이로 뭉쳐 놓은 기이한 형상에, 의미없이 행해지는 응급처치의 광경을 연출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상황들에서 과연 ‘인간성’은 존중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사유가 담겨있다. 정보의 폭력성을 그린 작품도 흥미롭다. ‘엉켜버린 기억’(2021)에서 작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강제로 주입되는 다양한 정보들로 과부화된 신경망을 파열된 혈관으로 묘사해 기억의 회로에서 손쓸 길 없이 새어나가는 정보의 누수를 상징했다.
이근민의 작품은 시각적으로는 그로데스크하지만 사회적 폭력성에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긍정적으로 형상화 한다.
자신의 병리적 경험과 사회 문제 탐구 등 이근만 작품의 영감은 다양한 곳에서 오지만, 이 외에도 작가가 평소 관심을 두고 있는 것들은 많다. 그는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즐기는 동시에 전문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시각 이미지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주변의 소리와 매일 접하는 다양한 텍스처를 비롯해 컴퓨터 그래픽과 동시대 기술까지 그의 호기심의 경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다양하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기념해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폭넓은 흥미와 호기심이 나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지만 직접적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미지로 켜켜이 쌓여갔다.“고 고백했다. 특히 그는 프랑스 작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1901-85)가 만들어낸 아르 뷔르Art Brut(어린이나 정신이상자 등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의 작품에 주목하고, 이들의 작품 속에서 순수함을 찾는 것)장르의 작품을 보고 많은 영감을 받는다고 말하며 시대의 주류보다는 비주류에서, 아웃사이더들의 행위에 더 공감한다고 밝혔다. 이근민 작가는 관객들에게 이 전시의 작품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권유하거나 강요할 생각이 없다. 단, 전시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작가와 같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 시대의 소수자들의 존재를 관객들이 기억해주는 것, 그리고 그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작가 이근민이 있다는 것, 그 정도다.
이근민은 아르 뷔르 장르에서도 특히 어린이나 배움이 짧은 작가들의 작품에 많은 공감을 느낀다. 그의 그림을 감상하다보면 해체적인 장 뒤뷔페의 작품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Refining Hallucinations (환각 다듬기)_Oil and Graphite on Paper_29.5 x 42 cm, 2015.
김이신 <아트 나우> 편집장
<아트 나우> 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