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사유가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실은 어려운 주제다. 그 먼 간극을 이어 줄 매개가 있다면 모를까. 이번 소개하는 작품은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그 이별을 마주하는 뭉클한 경험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잠 못 드는 숱한 밤이 오면

대부분 한 번쯤 경험해 봤겠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있다. 낮 동안 솟아올랐던 에너지가 희미해질 무렵, 가끔은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기 힘든 깊은 밤의 문이 열린다. 그 입구에 서서 다들 무슨 생각을 할까. 다음날 있을 중요한 일과를 떠올리는 이가 있을 것이고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그 앞에서 버릇처럼 나의 죽음을 떠올리곤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저 평소에는 작동하지 않던 예리한 더듬이를 세우게 하는 밤의 기운 탓이려니 생각할 뿐이다.

실제로 죽을 위기를 경험한 몇몇 지인들에게 숨이 넘어가기 직전, 지금껏 살아온 삶이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떠도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상당수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증언을 하는 걸 보면,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또한 이미 인간 내부에 탑재 된 ‘이유 있는’ 기능이 아닐까 싶다. 기억 속 먼 발치에 존재하는 그리운 사람들, 사무치도록 슬펐던 순간들.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한편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을 마주할 수도 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과연 나는 죽음 앞에서 어떤 기억을 만나게 될까라는 물음을 부메랑처럼 던지다 보면 때로는 깊은 잠으로 때로는 심연의 기억에 도달하는 꿈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잠 또한 매일 만나게 되는 모종의 작은 ‘죽음’처럼 느껴진다.

영화 <환상의 마로나>의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신비로운 환상동화 <환상의 마로나>

여기, 도로변 한가운데 강아지 한 마리가 쓰러져있다. 방금 로드킬을 당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인 가여운 강아지이다. 애니메이션 <환상의 마로나>의 오프닝은 강아지 마로나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야기는 마로나 인생의 맨 처음 지점으로 돌아가 출생의 순간과 성장의 시간을 차곡차곡 되짚기 시작한다. 읊조리는 듯한 내레이션 방식은 그 당시 마로나가 느꼈을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마로나는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 부모님의 만남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서로 인연이 없었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종의 엄마와 아빠. 그들에게서 태어난 9마리 형제 중 막내였던 마로나의 첫 이름은 ‘아홉’이다. 형제들을 떠나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된 ‘아홉’은 자신을 ‘아나’라고 불러주는 곡예사 마놀, ‘사라’라고 불러주는 건설업자 이스트반, 그리고 ‘마로나’로 불러주는 소녀 솔랑주를 차례로 만나며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환경 그리고 새로운 주인이지만 매 순간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하고 싶은 사랑스러운 강아지 마로나. 영화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마로나의 시점으로 바라본 작고도 큰 기억들을, 꿈결 속을 걷는 것 같은 환상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소환한다.

영화는 강아지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출처: 네이버영화

2019년 부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대상 및 관객상을 수상, 한 반려동물이 그려낸 감동적인 이야기와 독특한 작화로 많은 사랑을 받은 안카 다미안 감독의 <환상의 마로나>는 인간의 시점이 아닌, 오롯이 개의 시점으로 바라본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 생각해보면 대다수의 작품에서 개는 인간의 시점으로 바라볼 때 충직하고 다정한 캐릭터로 묘사되어 진다. 그에 비해 <환상의 마로나>는 인간과의 일차원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스스로 생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로써의 개를 상상한다. 이는 인간의 오래된 친구인 반려동물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감독의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과거의 기억을 다루는 소재, 독창적인 작화 스타일은 제목 <환상의 마로나> (원제는 마로나의 환상적인 이야기Marona’s Fantastic Tale이다.)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듯하다. 원색적인 톤과 무드, 콜라주 기법을 연상시키는 인물들,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구성할 수 있는 선과 면의 다양한 변형, 여기에 밤과 낮으로 극명하게 나뉘는 분위기는 시종일관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화려하면서도 몽환적이며 도전적인 현대 미술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 이는 즐거운 단잠에 취한 마로나의 기억, 그리고 그것이 품고 있는 ‘행복함’의 정서 일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인 강아지 마로나의 삶 속 다양한 기억을 그려낸다. 출처: 네이버영화

그러나 실상 마로나의 기억에는 행복함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로나가 만난 세상은 실망과 헤어짐, 두려움으로 가득 찬 기억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로나가 그렇게나 사랑했던 주인, 바로 인간이 있다. 주인들에 의해 마로나는 형제들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고, 부모에게 버려졌다.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주인은 자신의 성공을 생각하며 마로나에게 등을 보였고, 돌봐주던 이의 가족에게 끔찍한 폭력을 당해 마로나는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심지어 인간의 손에 이끌려 버려질 위험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로나의 기억이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어떻게 죽으면서 까지 주인들과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었을까. 사실 너무나도 단순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버려진 슬픔도 무색하게, 마로나는 저 멀리 보이는 솔랑주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당신은 나의 주인 그리고 나의 사랑이기 때문에.

작고 소중한 행복을 품고 세상을 떠나는 마로나를 통해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출처: 네이버영화

행복은 ‘작은 것’

불이 난 곳에서 잠든 주인을 살리기 위해 불 길 위에 몸을 던져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개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온다. 주인과 헤어졌지만 몇 백 킬로를 달려 집을 찾아온 ‘래시’에서부터 어릴 적 가여운 네로와 함께 눈물로 마음을 적시던 플란다스의 개 ‘파트라슈’까지. 익숙한 이름, 넘쳐나는 이야기 속 반려동물은 언제나 변치 않는 인간의 친구였고 가장 충실한 동지였다. 나에게도 16년을 함께 지내는 고양이가 있다. 나이가 있다 보니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만 들어도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가장 마음을 울렸던 이야기가 있는데, 주인보다 먼저 죽은 반려동물은 주인이 하늘나라에 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가장 먼저 뛰어나와 반긴다는 내용이다. 몇 번을 들어도 눈물이 쏟아진다. 인간보다 작은 이 존재들은 왜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는 것인지. 한편으로 인간이 이들의 과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로나는 말한다. 행복은 ‘작은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