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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7

에덴클래식 #14 드라마가 있는 클래식




얼마 안 있어 3월인데도 한동안 추위가 이어지고, 코로나 상황도 여전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이럴 때, 따뜻한 차 한잔이나 와인을 마시면서 듣기 좋은 클래식을 소개한다. 쇼팽의 녹턴을 한 곡씩 듣다 보면 어느새 따스한 기운이 몸과 마음을 감싸 줄 것이다.



쇼팽 : 21개의 녹턴, Frédéric François Chopin : 21 Nocturnes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 있는 지형적 원인으로 숱한 외세 침략을 받았다. 18세기 말에는 세계지도에서 나라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후 123년 만에 폴란드공화국으로 독립하였지만, 불과 20년이 지난 1939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에 다시 침공당했다. 이후 약 6년간의 2차 세계대전으로 수도 바르샤바는 완전 폐허가 되었고, 전쟁 중 사망자 수는 6백만 명가량으로 당시 폴란드 인구의 1/4가량이 희생을 당했다. 전쟁의 참상은 상상 이상이었고, 쉰들러 리스트(1993), 인생은 아름다워(1997) 등 홀로코스트(Holocaust,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를 다룬 영화를 보고 난 후엔 한참 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홀로코스트를 그린 영화 <피아니스트>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2년 제작된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또한 홀로코스트를 그린 명작이다. 폴란드의 실존 피아니스트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1911~2000)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폴란드인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작품으로, 폴란드계 미국인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야기를 이어주는 것은 바로 쇼팽의 작품이다.

‘1939년 바르샤바, 쇼팽의 녹턴을 녹음하던 중 스튜디오가 폭격을 당한다. 유대인인 슈필만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폐허가 된 시내의 한 저택 다락방에 숨어지낸다. 먹을 것이라고는 부엌에서 발견한 피클 통조림 한 통. 어렵게 통조림을 딴 순간, 수색 중이던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당한다. 피아니스트였다는 슈필만을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데려가 연주하게 한 독일 장교는 점차 그가 연주하는 쇼팽 발라드에 빠져든다. 안전을 보장하고 수시로 빵을 가져다준 그 장교는 바르샤바에서 퇴각하면서 음식과 자신의 외투까지 벗어준다. 슈필만은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군의 포로가 된 생명의 은인을 찾아보지만 실패한다. 6년 만에 찾은 자유, 그리고 슈필만은 쇼팽의 녹턴 녹음을 마친다.’



영화는 쇼팽의 녹턴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 출처: 네이버영화


쇼팽의 고향이 폴란드 바르샤바이다. 1810년 작은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난 쇼팽은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천재성을 보였다. 부친은 프랑스 농촌 출신이었으나 폴란드로 이주해 프랑스어 교사로 일했고, 모친은 몰락한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피아노를 꽤 연주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천재 쇼팽은 8세에 이미 작곡과 뛰어난 연주실력으로 바르샤바에 이름이 알려졌다.


“프레데리크, 그는 진정 음악의 천재이다....(중략)... 특히 작곡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놀랄만하다. 만약 이 소년이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명성은 이미 유럽 전역에 퍼졌을 것이다.” -‘바르샤바 리뷰’(1818)


폴란드는 1795년에 러시아, 프로이센(현 독일), 오스트리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되어 독립된 국가로 존재할 수 없었다. 음악가로서의 쇼팽의 명성은 높아졌고, 바르샤바 상류사회에 진입해 많은 친구를 사귀기도 했으나 약소국 폴란드는 계속 그를 붙잡아둘 수 없었다. 그의 재능은 더 넓은 세계를 기다리고 있었다. 1830년(20세) 10월 바르샤바에서 피아노협주곡 1번 초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여 일 후 쇼팽은 폴란드를 떠났다. 그리고 19년 후인 1949년(39세)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영화 ‘피아니스트’ 처음과 끝부분에 슈필만이 녹음하는 곡은 쇼팽의 녹턴(Nocturne, 야상곡夜想曲) 20번이다. 총 21곡의 녹턴을 남긴 쇼팽이 생전에 출판한 것은 18곡이고, 나머지 3곡은 사후에 발견되어 별도의 작품번호가 없이 유작(遺作, Op. Posth)으로 분류된다. 사후에 발견된 이 3개의 녹턴은 17세~20세에 작곡한 것으로 쇼팽이 출판한 18곡보다 먼저 작곡되었지만, 녹턴 번호로는 19번, 20번, 21번이 붙여졌다.




녹턴은 아일랜드 작곡가 존 필드John Field(1782~1837)가 창조한 피아노 독주곡 양식이다. 야상곡夜想曲으로 변역되는 녹턴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악상을 전개해 마치 조용한 밤의 분위기가 연상되는 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부드러운 왼손 반주에 오른손이 우아한 선율을 노래하는 피아노 독주곡이다. 쇼팽은 필드의 녹턴에서 영향을 받아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작곡했지만 감정의 깊이를 더했으며, 멜로디에 감미로움과 함께 극적인 표현을 추가했다. 세련되어졌고, 시적인 상상력이 풍부해져 필드의 녹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예술적 향기가 짙게 배어 나온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쇼팽 녹턴 전곡을 녹음한 백건우 씨가 한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쇼팽의 야상곡이라고 하면 '참 예쁜 곡',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곡'이라고 말해요. 그러나 전 이 곡이 굉장히 깊이가 있는 곡이라고 봐요. 자세히 들어보면 그 안에 들어있는 많은 드라마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21곡 중 가장 인기 있는 몇 곡을 들어본다.


-2번(Eb장조, 작품 9-2)

1830년(20세) 작품으로 음악적으로는 평범하고 감상적인 살롱 음악이라는 비평을 받기도 하나, 녹턴 중에서뿐 아니라 쇼팽의 모든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곡이다. 아마도 타이론 파워와 킴 노박 주연의 1956년 미국 영화 ‘애심(The Eddy Duchin Story)’ 영향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와 함께 녹턴 2번을 편곡한 영화 주제곡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5번(F#장조, 작품 15-2)

가장 아름다운 녹턴 중 하나로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명곡이다. 탄식하는 듯한 주제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끝부분 밝은 희망의 선율은 감미로우나 너무 짧아서 더욱 애틋하다. 몇 번을 되풀이해서 들어도 언제나 좋다.


-8번(Db장조, 작품 27-2)

1835년(25세) 작품. 론도풍의 감미롭고 매력적인 선율의 녹턴이나 감정에 치우치지만은 않는다. 세련되고 균형이 잡힌 구성에 기교적으로도 완전함을 요구하는 명곡이다. 한 평론가의 말이 와닿는다. “이 감미로움은 사람의 원기를 잃게 한다. 그 속에 독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마신다면 바흐나 베토벤을 해독제로 사용해야 한다.”


-13번(F단조, 작품 48-1)

1841년(31세) 원숙한 시기의 작품으로 가장 장대하고 내용이 충실하다. 녹턴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 극적인 흥분을 느끼게 한다.


-20번(C#단조, 유작)

1830년(20세) 작품이나 쇼팽 사후 20여 년 후에 발견하여 작품번호 없이 유작遺作으로 분류한다. 초고에는 ’nocturne‘이라고 적혀있지 않아 쇼팽이 녹턴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인지 알 수 없으나, 곡의 분위기와 구성이 여타 녹턴들과 유사해 ‘녹턴 20번’으로 분류한다. 영화 ’피아니스트‘에 삽입된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녹턴으로 자리 잡았다.


녹턴 전곡을 들으려면 2시간 가까이 걸린다. 그렇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도 음악이 들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아내와 대화하는 순간에도 녹턴은 들린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엔 하던 일을 멈추게 된다.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 음악 들어보기


쇼팽 : 21개의 녹턴, Frédéric François Chopin : 21 Nocturnes


-2번(Eb장조, 작품 9-2) Music from ‘The Eddy Duchin Story




-5번(F#장조, 작품 15-2) 연주 백건우 



-8번(Db장조, 작품 27-2) 연주 Valentina Lisitsa 



-13번(F단조, 작품 48-1) 연주 조성진



-20번(C#단조, 유작) 바이올린 편곡, 연주 한수진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