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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살아가다 보면 떠오르는 삶의 질문들. 딱히 규정하기 힘든 그 문제들 가운데, 로이 앤더슨의 영화는 정답 대신 수많은 일상의 지점에 놓인 단편적인 장면을 관통하는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모든 것은 삶이라는 이름위에 놓인다
로이 앤더슨 감독이 새 작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두 가지 감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하나는 갑자기 훅 나이 먹은 느낌이랄까. 그는 영화계에서 활동한 기간에 비해 비교적 작품 수가 적은 감독이기 때문에, 드문드문 그의 새 작품 소식을 들을 때면 버릇처럼 ‘그 전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살을 더 먹은 걸까’ 생각한다. 또 하나는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 감독, 또 얼마나 지루하고 무료하게 삶의 단막을 재현할까 싶은 마음이다. 2008년경 친구와 광화문 스폰지 하우스에서 봤던 그의 전작 <유, 더 리빙 You, The Living>을 떠올렸다. 존재와 삶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느슨한 희비극 형식으로 구성한 영화였다. 하지만 당시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카펫 하나를 고르기 위해 노부부가 15분간 아무 말 없이 카펫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이다. ‘슬랩스틱 개그로 봐도 무방할 정도네’ 잠시 이 정도의 생각을 한 것 같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유, 더 리빙> 이후 이 감독의 영화를 보고나면 인생이 그렇게 하찮게 느껴질 수가 없다. 아마 ‘산다는 거 참 별 거 아니구나’ 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기업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거래를 성사시킨 감동의 순간도 커다란 인생의 굴레 앞에 다 작고 작다. 평생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같은 정답 없는 고민도 그의 영화 어느 선에 다다르면 더 이상 별 문제가 아니다. 고단한 삶의 여정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작은 먼지 정도 될까. 자잘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농담 따먹기나 수천 년 이어져오는 깊은 철학적 사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이야기와 역사는 그저 경중 없이 생 위에 놓인다.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속으로
2021년 국내 개봉한 <끝없음에 관하여>는 로이 앤더슨의 회화적 연출방식과 더불어 그의 작품 전면에 배치된 허무함의 정서, 우울 그리고 위로 같은 접근이 역시나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된 작품이다. 영화는 두 남녀가 하늘위에 떠 있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떠 있는 것인지 부유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다만 끌어안은 두 사람의 무표정한 잿빛 얼굴은 회색 구름 속에서 암울하고 어둡게 느껴진다. 이들은 영화중반부 한번 더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완벽한 폐허가 된 도시 위를 날고 있다. 마치 서늘한 회화 한 점을 감상하는 것 같은 이 오프닝은 몽환적인 감성으로도 유명한 샤갈의 작품
이를 뒤로 한 채 영화는 대략 30개의 장면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짤막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먼 하늘 날아가는 새 떼를 바라보는 남녀, 아내에게 저녁을 만들어주려는 남자, 은행을 믿지 못해 돈을 매트리스 아래에 보관하는 남자,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웨이터 등등. 영화는 인과관계에 한없이 관대할 뿐 아니라 하나로 꿰어지지 않는 다양한 인간군상과 삶의 단면을 연속적으로 배치한다. 그것도 정지된 화면과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관조하듯 담아낸다.
영화는 짤막하고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아이러니로 점철된 우리네 삶은 끝이 없어라
독특한 지점은 이들의 모습 위로 어떤 여성의 내레이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의 절대적인 목소리로 상정된 내레이션은 주로 다큐멘터리에서 활용되며 대부분 근엄한 남성의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절대적인 신의 역할을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로 치환하는 순간 정답을 제시하는 규율과 정죄의 신은 사라지고, 어떠한 해답도 내어주지 않지만 인물들의 감정을 극중 공명에 이르게 하는 묘한 힘이 실린 신의 음성이 된다. 초반의 목소리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이다”와 같은 기본적인 상황정보를 내어주지만 계속해서 다른 사연이 등장할 때마다 인물의 정서적 측면을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전쟁으로 두 다리를 잃은 남성이 지하철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그는 슬프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의 현실문제에 답을 내어주지 않지만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신의 목소리가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는 가톨릭 사제의 절규 또한 등장한다. 이 사제는 다른 일회성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서사가 부여된 인물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한 날 부터 그는 십자가를 지고 채찍을 맞는 악몽을 꾼다. 의사는 그가 믿음을 잃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가톨릭 사제잖아요”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역시나 아이러니 하다. “그게 제 생계수단입니다” 믿음이 있으므로 사제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사제에게 믿음이 있어야하는 것인가. 믿음 상실의 문제를 붙잡고 울며 간절히 신을 부르짖는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지. 악몽 속 채찍을 맞으며 “내가 뭘 잘못했나요”를 중얼거리는 사제의 말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사의 아이러니 앞에 던지는 가장 순수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통해 가장 순수한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정답을 낼 수 없는 삶의 본 모습은 극 중 한 남자가 말하는 열역학 비유로 확장되어 그려진다. 한 커플이 방에 마주 앉아있다. 남자는 책을 읽는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이며, 이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계속 존재한다는 열역학 이론이다. 영화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서로 단절되어 있던 각 장면들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서로 잇고 잇는 끊임없는 순환으로 재탄생시킨다. 유한한 인간의 삶이 비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랑도 행복도 증오도 파멸도 영원하다. 만원버스 안에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라며 본질적 질문 앞에 흐느끼는 남자와, 이유 없이 나무기둥에 묶인 채 절규하는 또 다른 남자의 모습 속에 문득 가톨릭 사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2차 세계대전 말미 히틀러의 모습, 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남자, 추운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퇴각하던 쓸쓸한 군인들의 모습, 전쟁으로 죽은 아들을 추모하던 노부부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이가 태어나 기뻐하는 부부, 비 오는 날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는 딸의 신발 끈을 묶어주던 아빠는 명예살인 명목으로 딸을 죽이고 울부짖는 또 다른 아빠와도 오버랩 된다. 술을 넘치도록 붓는 웨이터와 샴페인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성 그리고 눈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지 않는 치과의사의 술잔까지. 치과의사에게 한 남자는 ‘이 모든 게 환상적이지 않은가’ 라고 묻는다. 삶은 환상적인가? 환상은 꿈이자 허상일 뿐이지만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삶은 환상이다. 그러므로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다.
열역학 이야기를 나누던 여성이 자신은 토마토로 태어나겠다는 말을 무심히 던졌듯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는 규정하기 힘든 수많은 인간사의 아이러니들을 그저 무심한 듯 바라본다. 이는 엔딩장면의 여운과도 일맥상통한다. 황량한 시골길 한복판에 멈춰버린 차를 그저 하염없이 고치는 한 남자의 뒷모습. 지나가는 이도 도와줄 이도 없다. 그 차가 잘 수리되어 그 곳을 빠져나갔을지 아니면 고물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여전히, 그리고 지금도 고치고 있는 한 인간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치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인생 앞에 서 있는 우리처럼 말이다.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