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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1-11-15

삶과 죽음, 기다림의 순환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년 죽음을 맞이하는 식물의 생애는 낯설고도 경이롭다.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오경아 작가가 겨울을 마주하는 식물, 그 죽음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밤새 속초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간신히 매달려 있던 정원의 모과나무의 잎이 결국 다 떨어진 듯 보인다. 감나무의 잎은 그보다 먼저였고, 이제는 남은 건 산딸나무의 한두 잎이 전부다. 나무의 잎뿐만이 아니다. 자르지 않고 남겨 둔 갈대도 초록색을 완전히 잃어 누렇게 바짝 말라 있다. 말랐다고 표현하지만 물기가 한 점도 없으니 올해의 생명은 끝난 셈이다. 정원에 간간이 보이는 초록은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회양목, 측백, 주목이다. 그러나 이 상록의 잎들도 실은 초록의 잎을 달고 있어도 간신히 부족한 광합성 작용만 하고 있을 뿐, 물이 얼기 시작하면 역시 성장을 멈춘다. 겨울이 오면 식물들은 이른바 잠정적 죽음인 ‘동면기’에 접어든다.




아프리카 케냐 인근에서 발원하는 나일강은 탄자니아,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콩고공화국, 에티오피아, 수단을 거쳐 이집트로 흘러가 지중해로 빠져나간다. 4천 킬로미터가 넘는 이 나일강은 남아메리카의 아마존강과 함께 이 지구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집트는 나일강이 지중해로 빠져나가는 하류 지점으로 강이 여섯 갈래로 갈라진다. 이 여섯 갈래의 줄기 사이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비롯한 지금의 과학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문명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 풍요로운 나일강은 이집트인들에게 생명의 힘만 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죽음을 해마다 가져왔다.


나일강을 따라 이동하는 크루즈를 타게 되면 상류인 아스완 강둑에 세워진 ‘콤 옴보’라는 신전을 볼 수 있다. 이 신전의 거대한 기둥은 뚜렷하게 색깔이 진한 진흙색과 옅은 갈색으로 구별이 되는데, 바로 그 지점이 나일강이 범람한 흔적이다. 한 번 범람한 강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사는 많은 이들의 생명과 그들이 일군 모든 농경지를 앗아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여름철 홍수가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이 범람을 지켜보면서 나일강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강이 홍수로 돌아오는 시즌을 계산해서 인류 최초의 달력을 만들고, 이 달력으로 시간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죽음의 일으키는 강이 실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힘이 된다는 걸 알아갔다.




이 지구는 밀봉된 세상이다. 아직 우린 우주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고, 우주에서도 이 지구를 열고 들어온 사례는 아직 없다. 46억 년의 역사를 지닌 지구는 그래서 질량 불변의 법칙 속에 순환 중이다. 그 순환의 가장 큰 법칙이 삶과 죽음이다. 죽음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엇인가 죽음을 맞이하면 그 터전 위에 새로움이 생겨난다.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죽게 되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가 되고, 그 분해된 유기물 속에서 새로운 식물의 싹이 트고, 성장을 하고, 그러다 다시 죽음을 맞게 된다. 결국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는 시작과 끝, 과거와 미래라는 일직선의 흐름이 아니라 돌고 도는 순환이라고 봐야만 한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말하는 우리가 맞게 된 죽음 이후의 세계도 실은 과학적으로 분석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충분히 그렇게 상상해볼 만하다.


나는 가을 정원에서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식물의 죽음을 목격한다. 설악산에 눈이 내리고, 물이 얼었다 풀리기를 몇 번쯤 반복하다, 드디어 물의 움직임이 적어도 바깥세상에서는 멈춰버리는 시기가 되면 식물들도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겨울은 어쩔 수 없이 한 해의 종결인 듯싶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식물의 겨울이 결국 다음 해 봄을 기약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가끔 식물의 흔적이 사라진 겨울 정원을 서성이다 보면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모든 기다림은 오지 않을 불안함을 안고도 있지만 올 것이라는 설렘이 더 크기에 추위와 빈곤함도 잘 참아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기다림으로 올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할 것이다.

오경아 작가, 가든디자이너

오가든스·오경아의 정원학교 대표. 방송 작가 출신으로 2004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녀는 영국에서 정원 디자인을 공부한 뒤 국내에 정원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인물이다. 가든 디자인 및 정원 관련 글쓰기를 통해 정원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가든 디자인의 발견><정원생활자><안아주는 정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