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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누구도 붙들 수 없는 영역의 것. 그 안에 ‘후회’라는 단어가 생겨나지 않기를 무척이나 바라지만 결코 쉽지 않다.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순간들. 그러므로 우리는 무수히 되돌아간다. 이번 영화는 저마다의 빛과 어둠이 새겨진 그 곳에 힘껏 머물 수 있게 해준다.
바쁜 일상 속 잠깐의 휴식이 주어지면 다양한 상념에 빠지기 마련이다. ‘좀 전 회의 때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로또에 당첨되면 제일 먼저 어디에 쓰지?’, ‘저녁은 간만에 외식을 할까?’ 대부분 조금 전 벌어진 일에 대한 회상이나 가까운 시일 내에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계획으로 소진되는 편이지만, 때로는 향수에 젖어 깊고 깊은 기억 어느 시점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나는 종종 (누가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타임머신이 생겨서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느 시기로 가게 될까’ 생각하곤 하는데 의외로 그 순간 꽤나 진지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몇 가지 후보군이 매번 치열한 밸런스 게임을 거치는데도 불구하고, 최종 선택은 언제나 2000년 즈음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1년 전이라면 어느 무렵이어도 좋다.
아빠는 증상을 느낀 후 처음 방문한 병원에서 말기암 진단을 받았고 3개월 후 돌아가셨다. 평소 너무나도 건강한 분이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그만큼 전이가 빨랐다고 한다. 오히려 힘든 투병생활을 겪지 않고 큰 고통 없이 돌아가신 게 그나마 다행이라며 어른들은 위로했다. 물론 나에게는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아빠가 어느 날부터 식사하기 힘들다고 하셨을 때, 한번 더 물어보지 못하고 무심하게 흘려버린 그 어린 날의 나를 여전히 원망한다. 조금만 더 빨리 병원에 가보자고 했더라면 항암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을텐데, 아빠는 치료 한번 제대로 시도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3개월만에 가족의 곁을 떠났다. 가끔 불쑥 찾아오는 아빠와의 기억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다. 어쩌면 그의 고통을 귀찮은 투정 쯤으로 생각해버린 나의 게으름이 아빠를 더 살뜰하게 사랑하지 못했던 죄책감으로 수 십년이 지나도록 남아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때로 ‘인생에 기적이 한번 쯤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라는 유아기적 망상에 갇혀 멍하니 아빠를 모시고 병원 문턱을 넘나드는 상상을 한다. 그것도 수십 번이나.
“과거 그 시기로 절 한 번만 돌려보내주세요. 진심이라고요.”
영화 <카페 벨에포크>는 모두에게 그리운 과거의 어느 부분을 그리고 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가장 좋았던 시기 ‘벨에포크’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백 투 더 퓨쳐>에서부터, 가장 행복했던 과거를 재현하는 <카페 벨에포크> 같은 영화가 주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과거로의 회귀’ 는 대부분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씩 꿔보는 상상인 듯하다. 실제 벨에포크The Belle Epoque는 세계대전 이전 가장 화려했던 유럽 예술의 시기를 뜻하는 말이지만, 지금은 가장 좋았던 시기, 그리운 시절 등의 의미로 활용된다. <카페 벨에포크>의 주인공 빅토르 또한 누구보다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이 있는 인물로 등장 한다.
한 때 만화가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던 빅토르(다니엘 오떼유). 하지만 지금은 집에 틀어박혀 몇 년째 새로운 작품만 구상중이다. 여전히 진취적이고 외부활동이 많은 아내 마리안느(화니 아르당)의 눈에 빅토르는 항상 과거의 고루한 방식만 집착하는 무능력한 사람일 뿐, 더 이상 그녀에게 남자로도 남편으로도 매력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아들의 친구 앙투안(기욤까네)이 운영하는 독특한 컨셉의 사업장을 알게 되는데 이름하여 ‘카페 벨에포크’. 즉, 이 곳은 의뢰인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과거의 정보를 수집하여 재현해주는 곳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사라진 과거는 생생하게 재현된 세트장과 전문 배우들에 의해 현실이 되고, 의뢰인은 마치 그 시기로 돌아간 것만 같은 시간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빅토르는 이 곳에서 가장 처음 아내를 만났던 그 시기를 떠올린다. 아내와의 위기로 고민인 그에게 과연 이 곳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영화 <카페 벨에포크>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과거는 진정 행복했던 것일까, 아니면 행복한 것으로 기억되는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빅토르의 반응이다. 사실 이 곳은 과거의 외향을 재현한 것일 뿐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빅토르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는 충실하게 재현된 세트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이따금 기억과 다르게 연출된 부분을 지적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사실 흥미로운 것은 모든 상황과 각본은 완벽하게 1974년에 맞춰 있어 의뢰인이 원하는 완벽한 재현에 가까웠지만 유일하게 재현할 수 없는 것은 의뢰인 자체, 즉 이전과는 달리 늙고 유약해진 빅토르 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르는 누구보다 이 곳에서 활기를 찾고 진심으로 들떠한다. 왜냐하면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리움으로만 존재했던 그 시절의 아내와 그 시절의 내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육체는 변화했으나 변화된 모습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현실에서 되찾게 해준 곳. 더 이상 그에게 카페 벨에포크는 뻔한 추억팔이가 아닌 무기력한 현재에 다시 활력을 주는 곳이 된다. 심지어 아내역할을 하는 전문배우 마고(도리아 틸리에)와 모종의 애정을 나누기도 하며 그의 삶 뿐만 아니라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그의 작업 또한 활기를 띄게 되는데 이는 결국 과거가 현실이 되는 순간, 이 현실은 앞으로의 또 다른 과거가 될 것임을 빅토르가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벨에포크를 행복의 시기로 기억하는 것은 과연 그 시기가 정말 행복해서일까, 아니면 과거가 행복으로 바뀐 것일까. 지금 행복하다면 과거도 행복했을 것이고 미래도 행복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품은 영화 <카페 벨에포크>는 러닝타임 내내 추억을 담뿍 담은 향수어린 미쟝센들로 레트로한 과거의 감성을 끄집어낸다.
허무맹랑한 이야기같던 카페 벨에포크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빅토르 만이 아니다. 출처: 네이버영화
나의 추억은 너의 오늘,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되어
인상적인 부분은 이 모든 변화가 결코 빅토르 한 사람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카페 벨에포크의 총괄책임을 맡고 있는 앙투안과 아내 마리안느의 또한 비슷한 변화를 경험한다. 앙투안은 사랑에 있어 매우 부족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극 중 아내의 역할을 재현한 배우 마고(도리아 틸리에)와 연인관계이지만 매번 그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몰라 오히려 마고에게 상처를 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화면 너머로 빅토르의 시간여행을 바라보던 그는 빅토르의 행동과 상황을 자신의 모습에 투사하기 시작하고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마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마리안느 역시 다시 한번 재현된 빅토르와의 70년대에 합류하게 되면서 그 시절 가장 열렬하게 사랑했던 빅토르를 다시 만나게 된다. 물론 지금은 이전과 같지 않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를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그때, 그 시기의 기억을 떠올리며 앞으로 맞이하게 될 위기를 함께 뛰어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벨에포크,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그 시기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땐 그랬지. 그때 참 좋았었지. 아쉬운 한숨으로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카페 벨에포크. 오늘 나도 용기내어 문을 열어볼 생각이다. 그 시절 나를 사랑했던 아빠, 울고 웃던 그 날, 땀에 젖은 채로 퇴근한 그를 끌어안을 때마다 수도 없이 맡았던 큼큼한 그 체취가 분명 말해줄 것만 같다.
더 이상 내 곁에 없지만, 나의 그 시기를 함께 한 당신은 여전히 지금도 이 자리에 있음을.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