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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것들을 향한 전시떨어지는 낙엽과 바스락거리는 걸음 소리, 쌀쌀해지는 바람... 잠시 포근했던 가을이 지나고 매서운 계절에 대비해야 할 때다. 조용하게 차분하게 내면의 흩어진 것을 불러 모아주는 11월의 전시들.
1. <SLOW박정화> 느린시간으로부터 온, 옻칠조형’
오늘날 ‘느림(slow)’은 단순히 속도의 열세가 아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 지속 가능한 것을 만들어 내는 지난한 과정의 가치가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정화 작가의 옻칠 기법도 느린 시간의 힘을 보여준다. 특수한 방식으로도 대중에게 깊이 다가가고 싶었던 작가의 노력은 전통이라는 굳건한 바탕과 새로운 공정을 합쳐 더욱 공고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SLOW박정화> ‘느린시간으로부터 온, 옻칠조형’전시 포스터.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과 기물은 초대작가의 작품 몇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협저(건칠)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협저 기법은 나무, 점토, 석고 등으로 기본 형태를 만든 후 그 위에 옻칠과 삼베, 모시 등을 겹겹이 쌓아 올려 불상이나, 그릇류를 만드는 아주 오래된 전통 기법 중의 하나다. 이는 자유로운 형태를 구현할 수 있어, 현대에는 조형작품이나 가볍고 단단한 용기를 제작하는데 쓰인다. 몇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옻은 여전히 최고의 하이테크 천연 접착제이자 도료이다. 옻칠 기물의 내염, 내열, 방수, 방충, 절연, 습도 조절 능력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중국에서 9000년 전, 일본에서 5500년 전 옻칠 유물이 발견된 바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기원전 5세기 유물이 출토되었으니 그 내구성과 보존성은 검증된 셈이다. 마치 이러한 특성처럼 작가는 이번 전시에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겠다는 염원을 느린 시간 속에서 구현했다’고 전했다.
11월 3일~8일/ KCDF 갤러리 2, 3전시장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11길 8)
2. 한진 <벡사시옹Vexations>
벡사시옹(Vexations)은 프랑스어로 ‘괴롭힘’이라는 의미다. 피아니스트 에릭 사티Erik Satie 작곡의 동명의 연주곡에서 따온 제목으로, 이 곡은 한 페이지 분량의 악보를 무려 840번, 그것도 매우 느리게 연주해야 한다. 작가 한진은 완주하는 데 대략 20시간이 소요되는 이 곡에서부터 자신의 작품세계와 유사점을 찾아냈다. 기억에 깊게 남겨진 풍경을 그려온 그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오는 것이 아닌 문득 닥쳐오는 기억도 폭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진, 〈Vexations No.11〉, 2021. 코튼 페이퍼에 과슈와 연필, 49.8 x 34.8 cm. 출처:원앤제이갤러리
한진 작가에게 ‘회화’란 자신에게 찾아 온 기억 속의 풍경들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반복하여 그려내는 것이다. 아주 느리게 질료와 그것들의 마찰을 받아들이면서 그 다음에 올 것을 대비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이러한 그림에 대한 태도를 3차원의 공간으로 펼쳐냈다. 전시장의 드로잉과 영상, 그리고 벽 드로잉은 작가가 ‘시간이라는 공간’과 ‘물리적인 공간’을 교차시키며 만들어내는 하나의 음(音), 오래도록 응시하며 남은 하나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작품과 관객의 움직임, 공간과 시간이 이러한 시각적 장면으로 떠올라 변주, 시차를 거치며 840번의 연주가 완주(完奏)되는 과정으로 탄생한다.
10월 8일~11월 7일/ 원앤제이 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31-14)
3. <덕수궁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Deoksugung Project 2021 : Garden of Imagination
현대미술가, 조경가, 애니메이터, 식물학자, 무형문화재까지, 다채로운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만나 덕수궁을 빛내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네 번째 개최인 올해는 ‘정원’이라는 매개를 가지고 덕수궁의 역사와 이 시대의 정원이 가지는 의미, 가치를 담아냈다. 정원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지만, 오늘날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도시인들에게 ‘제2의 자연’으로서 어찌 보면 필수적인 존재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의 정원이거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정원일 수도 있다. 작가들은 이를 다시 생각하고 재해석하면서 다양한 관점의 열린 정원을 만들어 냈다.
이용배x성종상, 몽유원림, 2021, 애니메이션.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작가들의 세대와 분야가 각양각색인 만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의 스펙트럼도 넓다. 시대별로 각기 다른 가상의 정원사로부터 탄생한 덕수궁 터의 정원을 보여주는 권헤원 작가의 영상 작업을 비롯해, 폐목을 재생해 고목과의 상상 대화를 담은 작가 윤석남, 동서양의 조화와 전통과 현대, 안과 밖, 생명체와 비생명체 등 이질적인 것들의 긴장된 공존이 있는 하이브리드 정원을 만들어낸 조경가 김아연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밖에도 애니메이터 이용배와 성종상이 함께한 고종의 상상 속의 정원 애니메이션 등 장르와 매체를 아우르는 작가들의 상상력과 이야기가 짧은 가을 덕수궁을 거닐 경쾌한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9월 10일~11월 28일/ 덕수궁 야외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황은비 에덴미디어 편집장 대행
에디터, 기자, 에세이스트. 언론을 전공하고 매거진, 일간지 등 매체에서 일했다. 현재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오가며 기억될 콘텐츠를 고민하고 만든다. 2021년 에덴미디어 편집장 대행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