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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9

사진 찍는 박찬욱



영화 거장의 수식을 잠시 내려두고 사진가로 첫 개인전을 연 박찬욱 감독. 그 이름 안에서 발견하게 될 새로운 피사체를 상상해 본다. 믿고 보는 우리에겐 기쁘기 그지없는 소식이다.


“사진작가로서 데뷔전을 치르는 기분입니다”. 10월 1일, 옛 고려제강 건물이던 복합 예술 공간 F1963에 위치한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영화감독 박찬욱이 개인전을 열었다. <너의 표정(Your Faces)>에는 2013년부터 그가 틈틈이 찍은 약 30여 점의 사진이 관객과 만나고 있다.


10월 1일, 부산 국제갤러리에는 유례없이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간 그곳에서 열린 구본창, 하종현, 대니얼보이드, 김홍석, 칸디다 회퍼, 안규철 작가 등 국내외 굵직한 작가들의 전시 오프닝 때도 세간의 관심이 높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그만큼 영화감독 박찬욱이 사진가로서 본격적인 작품을 선보인 개인전은 미술계에서도 큰 이슈였던 셈이다. 박찬욱은 자신의 최초 개인전인 이번 전시를 위해 어떤 사진을 선보일지 오랜 시간 고민했고 전시 구성에도 많은 시간을 들여 큐레이터들과 토론했다. 무엇보다 영화 감독이 아닌 사진 작가로서 따로 활동명까지 고민했을 정도. 대중의 시각에서 영화와 사진은 별개 활동으로 보일 만하기에 사진작가로 활동할 때 ‘부캐’처럼 다른 이름을 작명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전시 오픈과 맞춰 사진집을 함께 출간했는데, 사진집에 들어가는 바이오그래피에도 영화 경력을 전부 제외할까 생각했었다고. 하지만 영화와 사진 모두 결국 박찬욱 한 사람의 시각이 공통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에 ‘박찬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결정했다고 고백했다.



워싱턴 D.C. 뮤지엄에서 GV 대기시간에 찍은 소파 작품. 적당한 심도와 소파의 텍스처를 살린 빛 밝기는 사진을 매우 촉감적으로 만든다.


그 동안 박찬욱의 사진을 감상할 기회는 가끔 있었다. 고등하교 시절 아버지의 아사히 펜탁스를 사용하다 대학에서 니콘 FM을 사용하던 그는 20여년 전 즈음 라이카를 처음 접하면서, 라이카에서 주최하는 사진 그룹전에 종종 참여했다. 그 뒤에도 자선전, 사진집 등의 형태로 팬들과 만나다 2017년 CGV 용산아이파크몰에 박찬욱 헌정관이 생기면서 헌정관 입구에 사진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지금까지 넉 달에 한번 여섯 장씩 사진을 교체하며 상설 전시 중이다. 박찬욱 감독은 개인 인스타그램에도 사사로운 이야기 대신 자신의 사진 작품을 포스팅해 마치 온라인 갤러리처럼 운영하고 있다. 동생 박찬경 작가와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영상작업을 중심으로 광주 아시아문화의전당에서 회고전을 열었지만, 이번 전시는 국내 최고의 상업 갤러리에서, 오직 사진작품만으로 승부를 본다는 의미에서 정식 데뷔전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위한 것들.



‘Face 127’(2020). 박찬욱 감독은 관람객들이 자신의 사진 속 피사체가 하찮지 않은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그리고 미국에서 제작 지원한 드라마 <스토커> 연출 등으로 국제무대에서까지 크게 인정받고 있는 박찬욱 감독이 사진을 처음 시작한 건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며 취미로 시작한 사진 동아리에서다. 서강대학교 사진 동아리는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강한 사진이 강점으로, 거리 풍경이나 인물이 중심이었지만 박찬욱 감독은 당시, 우연히 만난 풍경과 그 속에 무심코 놓은 사물에 관심이 많았다.





일상의 시간에서 우연히 만난 사물과 동물을 촬영한 ‘Face 106’(2016)과 ‘Face 89’(2012).

대학시절부터 박찬욱의 카메라를 붙잡은 피사체를 주로 이런 장면들이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을 기점으로 박찬욱은 영화계에서 본격적인 러브콜을 받게 되면서 영화 촬영과 홍보, 로케 답사, 영화제 방문 등으로 낯선 도시를 방문하고 여행(출장)할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하지만 여행은 고사하고 비행기 타는 것조차 싫어했던 그는 출장지에서 공식적인 일정 외에는 홀로 도시의 골목길을 걷고 사진을 찍으며 낯선 여행지에서 그렇게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박찬욱 감독이 이렇게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리고 출장지에서 촬영한 수많은 사진들은 영화의 결정적 미장센이 되었다. 영화 <아가씨>에서 김민희가 연기한 ‘히데코’역을 이미지화하는데 그가 촬영한 흰털 고양이 사진이 결정적이었다는 건 익히 유명하다. 또한 현재 후반 작업 중인 박해일과 탕웨이 주연의 <헤어질 결심>에서도 그가 예전에 찍은 해변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그 곳을 다시 찾아 중요한 장면을 촬영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사진을 영화의 레퍼런스로 많이 차용한다. 이번 전시는 이렇듯 그간 일본과 미국, 영국, 모로코 등을 여행하며 박찬욱의 시각으로 우연히 재발견한 풍경과 사물이 무엇인지 선보이는 자리다. 여행가의 시선이기에 앞서, 컬러와 질감, 패턴 등으로 찰나의 아름다운 미장센을 뽑아내는 박찬욱 감독의 시각이 더해진 사진들은 관객에게 풍성한 스토리를 전한다.



‘Face 107’(2013). 비옷을 말려 둔 모습을 찍은 작품. 사물의 질감이 가진 고유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Face 45’(2015). 거대한 바위의 옆모습이 마치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사진에서 그날의 빛과 온도가 함께 느껴지는 듯하다.


박찬욱의 아이패드에는 약 8000장 정도의 사진이 있다. 이번 <너의 표정(Your Faces)>전시를 위해 사진을 고르는 작업은 그야 말로 ‘덜어내기’의 연속이었다. 그가 대학시절 필름카메라로 촬영했던 작품과 나무와 절, 뮤지엄 등을 시리즈로 촬영했던 작품은 다른 기회에 선보일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우선 제외했다. 그리고 남은 사진들 중에 박찬욱 감독의 눈에 하나의 일관된 세계를 보이고 있는 작품들을 모았다. 촬영한 도시도, 대상도 모두 다르지만 대부분의 작품 제목은 ‘표정(Face)’으로 시작한다. 자연 풍경과 건물, 사물에 각자 그 순간의 고유한 생동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 속 피사체에서 그 생동감을 발견한 관객에겐 그것이 무생물일지라도 생명을 지닌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찬욱 감독이 관객에게 바라는 키 포인트다. 자신의 사진이 관객에게 일대일로 다가가 관객 마음 속 깊이 자리한 특정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거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용을 하기를 바란다. 그것도 관념적 해석이 아닌 즉각적 반응으로 말이다.



'Face 16'(2013). 모로코의 한 호텔에서 촬영한 수영장 파라솔들. 박찬욱 감독은 파라솔이 유령들이 모여 있는 모습 같았다고 고백했다.


마지막으로 박찬욱 감독의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우연한 순간을 촬영했음에도 오랜 시간을 들인 하나의 조각이나 설치미술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는 정물화와 심지어는 초상화처럼 느껴지는데, 박찬욱 감독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 자신의 사진에 담긴 모든 피사체가, 그것이 설령 길가에 버려진 어떤 무생물일이지라도 모두 본연의 가치가 있음을 관객이 알아채기를 바란다. 남들이 보기에 대단한 물건이나 풍경이 아니더라도 박찬욱의 시선에서 사진으로 영원히 기록하는 순간, 사진 속 사물은 하찮음에서 마치 메이크업을 받고 화려한 스타일링을 마친 모델처럼 온전한 하나의 주인공이 된다. “우리의 삶이 늘 빛나는 순간만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 자기만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갖춘 것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을 제 사진을 통해 알려주고 싶어요. 그것을 위해 저는 카메라를 듭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박찬욱의 사진은 ‘내가 그 순간 거기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영원히 볼 수 없는 순간’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Face 3’(2013).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빛을 받는 용설란 줄기의 실루엣을 포착하고 찍은 사진.

줄기 윤곽선과 빨간 자동차의 컬러가 대조를 이루며 일종의 율동감을 선사한다.



'Face 6’(2016). 호수를 유유히 부유하는 청둥오리와 그 주변의 물고기들, 그리고 늘어진 나무 가지들이 서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김이신 <아트나우> 편집장

<아트 나우> 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