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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모두 안타깝지만, 특히 짧은 생을 살다간 이들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자아낸다. 평생에 걸쳐 죽음과 가난의 그림자가 드리운 천재 작곡가에게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가 남긴 수많은 걸작은 삶 속의 어둠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롱한 빛을 뿜어낸다.
슈베르트, 현악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Schubert, String Quartet No.14 in D minor ‘Der Tod und das Mädchen
나이 들어가면서 점차 ‘죽음’에 대한 인식도 바뀌는 것 같다. 여전히 낯설고 두렵긴 하지만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것은 너무도 명확한 명제이기에 오히려 생각할수록 남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짐을 느낀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죽음과는 너무 동떨어진 단어다. 한 번도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나이일 것만 같다. 그렇기에 어릴 적 읽은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 주인공 소녀의 죽음은 더욱 애틋하고, 16세의 나이에 죽은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소녀: 가세요, 아, 지나가세요! / 무서운 죽음의 사신이여! / 난 아직 젊으니, 가세요, 제발! / 나를 만지지 말아요.
-죽음: 네 손을 다오, 아름답고 사랑스런 소녀여! / 나는 친구이지, 벌하러 온 게 아니야/
편안히 하여라! 난 거칠지 않으니, / 내 품에 안겨 평안히 잠들게 되리!
슈베르트Franz Schubert(1797~1828)는 1817년(20세)에 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1740~1815)의 작품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에 곡을 붙인 동명의 가곡을 작곡했다. 2년을 앞서 18세에 작곡한 ‘마왕’이 병마에 죽어가는 어린 소년의 죽음을 묘사한 가곡인 반면, 이 곡은 두려움에 떨며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소녀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 다르다. 슈베르트에게 ‘죽음’이란 평생 그를 괴롭힌 명제이자 예술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난과 병마로 점철된 그의 짧은 인생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얘기가 많지 않다. 가난한 시골 학교의 교장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보조교사 생활을 잠시 하다가 뛰쳐나왔고, 20세 무렵부터 친구의 집 등을 전전하며 가난한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하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슈베르트는 19세 때 만난 자유분방한 기질의 시인 쇼버와 친하게 지내면서 잠시 방탕한 생활에 빠졌고, 그로 인해 당시로선 불치병인 매독에 걸렸다. 불행한 천재는 20대 초반부터 항시 병마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나마 위로가 돼 준 것은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들과의 모임이었다. 소심하고 말주변이 없는 슈베르트이었지만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차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모였고, 1821년(24세)엔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는 음악 사교 모임이 만들어졌다. 슈베르트는 이 모임을 통해 많은 피아노곡과 가곡을 발표했으며, 이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점차 널리 퍼져나갔지만, 경제적 수완이 부족했던 슈베르트는 여전히 빈곤했다. 그리고 그의 병마는 나아지질 않았다. 1828년(31세)에 열린 슈베르티아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대하게 진행됐고, 슈베르트 작품만으로 구성한 공개연주회로 비교적 많은 수입도 얻었다. 이에 고무된 슈베르트의 창작력은 절정에 달해 피아노 소나타 3곡, 현악오중주 등 명곡을 잇달아 작곡했다. 그렇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그해 가을 장티푸스균에 오염된 물을 마신 슈베르트는 매독 치료에 사용된 수은 중독으로 약해진 몸을 더이상 지탱할 수가 없어 11월 19일 31세의 나이로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가끔 ‘만약 슈베르트가 베토벤처럼 57세까지 살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그 짧은 생애 동안 남긴 작품 수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600곡이 넘는 가곡, 9개의 교향곡, 15곡의 현악사중주, 피아노 소나타 21곡, 그 외에도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의 실내악곡과 피아노 독주곡들을 남겼다. 짧은 생을 오로지 작곡에만 바친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20대 중반에서 31세까지 슈베르트가 작곡한 곡들을 들어보면 같은 나이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작품들보다 작품성이나 완성도가 높다. 특히 후기 실내악곡이나 피아노 독주곡에는 20대 젊은 작곡가라고는 믿기지 않는 원숙함이 배어있다.
슈베르트는 1823년부터 건강이 악화되면서 계속된 항생제 치료로 인한 신경쇠약으로도 고통받았다. 1824년 3월 친구에게 쓴 편지 중 한 부분을 읽어보면 당시 슈베르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매일 밤 잠을 청할 때면 나는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네. 그런데 나는 매일 아침 깨어나 지난날의 고통을 떠올려야 하네. 기쁨도 없이, 친구도 없이 내 나날은 흘러가고 있네.” 그 고통 속에서도 작곡은 계속했다. 15곡의 현악사중주 중 가장 유명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14번 ‘죽음과 소녀’ 작곡에 착수한 시기가 그해 3월이다. 아마도 죽음을 예감한 슈베르트는 자신이 20세에 작곡한 가곡 ‘죽음과 소녀’를 자연스레 떠올렸을 테고, 자신의 처지를 대변할 실내악곡을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4악장으로 구성된 현악사중주의 2악장에 가곡 ‘죽음과 소녀’의 피아노 반주 선율을 주제로 사용했다. 2년 후인 1826년(29세)에 완성한 이 곡은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중에서뿐 아니라 고금의 모든 현악사중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곡 중의 하나다.
(1악장)
4개의 현악기 합주로 시작하는 첫 소절은 마치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 ‘운명’의 주제 선율처럼 강렬하다. 인생의 고뇌를 함축시켜 표현한 듯한 이 주제 선율은 1악장 전체를 지배한다. 중간에 서정적이고 온화한 분위기의 제 2주제 선율이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하지만 곧 강렬한 제 1주제 선율에 제압당한다. 격한 감정을 억누른 채 쓸쓸한 여운을 남기면서 조용히 끝을 맺는다.
(2악장)
가곡 ‘죽음과 소녀’의 피아노 반주를 주제로 하여 6개의 변주곡으로 구성했다. 장송행진곡 풍의 주제 선율은 우울하고 슬프다. 그렇지만 아름답다. 슬픈 이들에게 위안을 주듯 온화한 분위기도 느껴진다.
(3악장)
스케르초*의 빠른 악장이다. 분위기를 전환했지만 슈베르트의 스케르초는 흥겹게 느껴지지 않는다. 2악장의 슬픔이 가시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스케르초: scherzo 해학곡, 익살스런 풍의 경쾌한 곡 .
(4악장)
장대한 구성의 론도* 악장으로 중심 주제인 강렬하게 질주하는 듯한 춤곡이 몇 번을 반복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강렬한 질주일까 싶기도 한다. *론도 Rondo: 중심 주제가 삽입곡을 사이에 두고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형식.(A-B-A-C-A)
♪ 음악 들어보기
슈베르트, 가곡 ‘죽음과 소녀’
-제럴드 무어Gerald Moore 연주, 크리스타 루드비히Christa Ludwig 노래.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Alban Berg Quartet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