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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1-09-07

인생 3막을 위한 팡파르



인생에 대한 비유는 많다. 마라톤, 항해, 사계절… 그 중에도 연극은 특히 와닿는 비유가 아닌가 한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저마다의 막이 오르고 내리는 한 편의 연극. 여기 ‘우아한 노년’을 제목으로 은퇴 이후 새 막을 올린 한 명의 배우가 있다.


별다른 경우가 아니면 65세까지 꽉 채워 일할 수 있는 의과대학 교수가 정년을 앞두고 2년이나 먼저 자발적으로 퇴직했다니 인터뷰와 기삿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구하기도 힘들고 지켜나가기도 힘든 것이 안정된 직장인데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왜 궁금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른 은퇴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몇 권의 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병리 전문의로서 병원에서의 역할과 병리학자로서 대학에서의 연구 활동이 정점에 이른 40대 중반에 번역 의뢰를 받은 (국내 번역서 <우아한 노년>으로 2004년 출간)가 그 첫 번째 책이다. 미국의 노트르담 수도회에 속해 있는 678명의 수녀님을 대상으로 노화와 알츠하이머병을 연구한 ‘수녀연구’라는 제목의 역학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그린 책이었다. 수녀님들 가운데 의미가 풍부한 어휘를 자주 사용하는 분, 교육 정도가 높은 분, 모든 면에서 긍정적인 분, 그리고 뇌 건강에 이로운 음식을 적극 섭취하고 정기적으로 운동하시는 분들이 그렇지 않은 수녀님들보다 뇌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하셨다고 한다. 기초적인 인지검사를 시작으로 수녀님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정기적으로 생활 활동성과 치매인지검사를 시행하고 치매 관련 유전자 검사와 함께 마지막에는 뇌 부검까지 시행한 최신 연구 결과가 너무나 상식적인 내용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연구 결과는 평범함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번역한 것이 보람 있었던 것은 이르다면 이른 나이인 40대 중반에 나 자신의 노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를 그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노년이 우아할 수도 있겠다고, 내심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만난 두 번째 책이 이다. 이 책의 내용인 즉슨, 100세 장수의 시대가 되는 21세기에는 우리 모두 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고 그 지식을 토대로 몸과 마음을 제대로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중에 내 머리에 깊이 박힌 내용이 바로 ‘절대로, 절대로 은퇴하지 마라!’ 그러기 위해서는 ‘일찍부터 경력을 다양화하라!’는 것이었다. 절대 은퇴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는 은퇴를 졸업이나 결혼식처럼 인생에서의 또 하나의 이정표로 생각하고 은퇴 전과 후가 확연히 구분된다고 오해하고 있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 인생은 출생에서 죽음까지 길게 하나로 연결된 길과 같아서 은퇴 후라고 그 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은퇴자가 그 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기존 수입의 70~80%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 경제적 준비까지 되어 있으려면 내 나이의 베이비 부머 세대는 우리 앞세대와 같은 나이에 은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어떤 일이든 일을 더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나의 사전에서 ‘은퇴’라는 말을 지워 버리고 인생을 ‘재창조(re-creation)’하자고 한다.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였다. 일생을 교육을 받는 시기, 직업을 준비하는 시기, 직업을 갖고 일하는 시기, 그리고 여가를 보내는 시기로 깔끔하게 나누지 말고 평생 학습, 평생 근무, 평생 경험이라는 개념을 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인생 재창조’는 첫 직장을 나가는 첫날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젊을 때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만들지 못하면, 아니 그런 일을 가슴에 품고 있기라도 해야지 은퇴 후 갑자기 그런 일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할 때 보람과 약간의 흥분마저 느끼는가? 또 어떤 일을 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내가 이 책을 만났을 때는 이미 자발적으로 몇 권의 책을 번역하고 출간했었는데 누가 시켜서 시작한 일도, 돈을 벌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나만 알기에는 아까운, 다시 말해 남들과 책의 내용을 나누면 좋겠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병원과 대학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자투리 시간에 짬짬이 번역한 책이 한두 권 출간될 때면 병리학 분야의 연구 결과를 유명 학술지에 기고했을 때와 맞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이를 <은퇴 없는 삶을 위한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출간하며 1인 출판사인 허원미디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부터 내 인생의 ‘재창조’ 프로젝트는 시작된 셈이다. 이후로도 번역의 즐거움과 보람이 번역의 어려움을 늘 넘어섰기에 꾸준히 번역하고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본업인 의사와 교수로서의 생활에 번역과 출판이 부업이 되어 갔다. <은퇴 없는 삶을 위한 전략>에서 배운 또 하나의 지혜는 취미나 부업을 본업처럼 진지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내게 좋은 책을 번역하는 일은 부업이었지만 나는 전문 번역가처럼 진지한 자세로 임했고 점차 본업이 되어갔다. 이렇게 중년을 보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노년을 맞는 준비와 노년의 종착역인 죽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노년을 보내고 죽음을 맞지만 자신의 노년과 죽음을 미리 그려보고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오는 일로만 생각할 뿐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 노년은 그리 기대하지 않는 시간, 노인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나이 들고 모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노년도 죽음도 다른 일과 똑같아서 성공하려면 젊었을 때 그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좋은 책을 번역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세 번째 책이 이다. 전 세계적으로 죽음학의 효시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와 함께 <인생수업>, <상실수업>을 집필한 저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이 책을 통해 죽음을 맞는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평안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삶이 끝나갈 때 필요한 것들>이라는 책으로 소개되었고, 이 책을 계기로 내가 재직하는 의과대학의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죽음 준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당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이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존엄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네 번째 책 를 만나게 되었다.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통해서였다. 서구에서는 청소년들이 이런 책까지 접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국내에서는 존엄사/안락사 문제를 중립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 직접 번역하고 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은 허원미디어에서 <삶을 선택할 것인가,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가을에 출간되었다.




이제 나는 이 네 권의 책에서 배운 대로 은퇴 후에 나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재직하던 울산대학교의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라는 교양과목을 시작했고, 울산의대의 예비의사들을 대상으로 ‘삶과 죽음 이해’라는 죽음학 수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미 의사가 된 의료인을 대상으로 ‘의료인의 삶과 죽음 이해’라는 대학원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2021년 7월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은 전체 인구의 16%를 넘어섰다. 2000년에 고령화 사회가 되었고 2017년에 고령사회를 지나,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가 될 거라고 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보면 우아한 노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첫째, 노년이란 희망이 사라진 우울한 시기가 아니고 그동안의 인생의 달고 쓴 경험이 지혜로 무르익은 풍성한 시기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보자.

둘째, 각자 노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그 모습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꼼꼼하게 따져보고 계획을 세우도록 하자. 오늘은 내일보다 젊기 때문에 바로 오늘 그 일을 시작하도록 하자.

셋째, 세운 계획을 혼자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응원하며 한걸음한걸음 함께 나아가자.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우아한 노년을 보장하는 제일 중요한 요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혼자서는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라면 오래갈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한 편의 연극인 내 인생 3막의 커튼이 올라갈 때 울린 팡파르는 악대가 연주하는 시끌벅적한 음악이 아니고 몇 권의 책이었지만 여러분 인생 3막을 위한 팡파르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이제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여러분 인생 3막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가져 보셨으면 한다.

유은실 서울아산병원명예교수, 허원미디어 대표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리과 전문의가 된 후 1989년부터 울산의대 서울 아산병원 병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의사이자 번역가로 '여의사의 역사, '병리학의 역사', '우아한 노년', '유전자시대의 적들', '천재들의 뇌' 등 의과학 도서를 번역하였다. 병리의사로서 삶과 병행해 2006년부터 도서출판 허원미디어를 설립했고, 은퇴 후에는 본격적인 운영에 나섰다. 유튜브 '우아한 노년'을 통해 죽음 등에 관해 소통하는 크리에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