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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한 비유는 많다. 마라톤, 항해, 사계절… 그 중에도 연극은 특히 와닿는 비유가 아닌가 한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저마다의 막이 오르고 내리는 한 편의 연극. 여기 ‘우아한 노년’을 제목으로 은퇴 이후 새 막을 올린 한 명의 배우가 있다.
별다른 경우가 아니면 65세까지 꽉 채워 일할 수 있는 의과대학 교수가 정년을 앞두고 2년이나 먼저 자발적으로 퇴직했다니 인터뷰와 기삿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구하기도 힘들고 지켜나가기도 힘든 것이 안정된 직장인데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왜 궁금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른 은퇴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몇 권의 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병리 전문의로서 병원에서의 역할과 병리학자로서 대학에서의 연구 활동이 정점에 이른 40대 중반에 번역 의뢰를 받은
노년이 우아할 수도 있겠다고, 내심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만난 두 번째 책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나의 사전에서 ‘은퇴’라는 말을 지워 버리고 인생을 ‘재창조(re-creation)’하자고 한다.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였다. 일생을 교육을 받는 시기, 직업을 준비하는 시기, 직업을 갖고 일하는 시기, 그리고 여가를 보내는 시기로 깔끔하게 나누지 말고 평생 학습, 평생 근무, 평생 경험이라는 개념을 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인생 재창조’는 첫 직장을 나가는 첫날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젊을 때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만들지 못하면, 아니 그런 일을 가슴에 품고 있기라도 해야지 은퇴 후 갑자기 그런 일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할 때 보람과 약간의 흥분마저 느끼는가? 또 어떤 일을 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내가 이 책을 만났을 때는 이미 자발적으로 몇 권의 책을 번역하고 출간했었는데 누가 시켜서 시작한 일도, 돈을 벌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나만 알기에는 아까운, 다시 말해 남들과 책의 내용을 나누면 좋겠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병원과 대학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자투리 시간에 짬짬이 번역한 책이 한두 권 출간될 때면 병리학 분야의 연구 결과를 유명 학술지에 기고했을 때와 맞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이
본업인 의사와 교수로서의 생활에 번역과 출판이 부업이 되어 갔다. <은퇴 없는 삶을 위한 전략>에서 배운 또 하나의 지혜는 취미나 부업을 본업처럼 진지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내게 좋은 책을 번역하는 일은 부업이었지만 나는 전문 번역가처럼 진지한 자세로 임했고 점차 본업이 되어갔다. 이렇게 중년을 보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노년을 맞는 준비와 노년의 종착역인 죽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노년을 보내고 죽음을 맞지만 자신의 노년과 죽음을 미리 그려보고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오는 일로만 생각할 뿐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 노년은 그리 기대하지 않는 시간, 노인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나이 들고 모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노년도 죽음도 다른 일과 똑같아서 성공하려면 젊었을 때 그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좋은 책을 번역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세 번째 책이
이제 나는 이 네 권의 책에서 배운 대로 은퇴 후에 나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재직하던 울산대학교의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라는 교양과목을 시작했고, 울산의대의 예비의사들을 대상으로 ‘삶과 죽음 이해’라는 죽음학 수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미 의사가 된 의료인을 대상으로 ‘의료인의 삶과 죽음 이해’라는 대학원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2021년 7월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은 전체 인구의 16%를 넘어섰다. 2000년에 고령화 사회가 되었고 2017년에 고령사회를 지나,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가 될 거라고 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보면 우아한 노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첫째, 노년이란 희망이 사라진 우울한 시기가 아니고 그동안의 인생의 달고 쓴 경험이 지혜로 무르익은 풍성한 시기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보자.
둘째, 각자 노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그 모습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꼼꼼하게 따져보고 계획을 세우도록 하자. 오늘은 내일보다 젊기 때문에 바로 오늘 그 일을 시작하도록 하자.
셋째, 세운 계획을 혼자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응원하며 한걸음한걸음 함께 나아가자.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우아한 노년을 보장하는 제일 중요한 요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혼자서는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라면 오래갈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한 편의 연극인 내 인생 3막의 커튼이 올라갈 때 울린 팡파르는 악대가 연주하는 시끌벅적한 음악이 아니고 몇 권의 책이었지만 여러분 인생 3막을 위한 팡파르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이제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여러분 인생 3막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가져 보셨으면 한다.
유은실 서울아산병원명예교수, 허원미디어 대표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리과 전문의가 된 후 1989년부터 울산의대 서울 아산병원 병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의사이자 번역가로 '여의사의 역사, '병리학의 역사', '우아한 노년', '유전자시대의 적들', '천재들의 뇌' 등 의과학 도서를 번역하였다. 병리의사로서 삶과 병행해 2006년부터 도서출판 허원미디어를 설립했고, 은퇴 후에는 본격적인 운영에 나섰다. 유튜브 '우아한 노년'을 통해 죽음 등에 관해 소통하는 크리에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