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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정통성 사이의 고민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클래식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20세기 변화의 흐름 가운데 고전의 형식을 이어간 시벨리우스의 작품들은 예술의 본질을 향한 치열한 고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Sibelius, Symphony No.2 in D major, Op.43
“현대에는 왜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가 나타나지 않나요?” 이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제대로 답하려면 음악사 흐름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하지만, 종종 미술에 비유하는 것으로 간단히 대신하곤 한다. “현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물론 빈센트 반 고흐 화풍으로 그리는 화가도 없지요. 그들처럼 잘 그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20세기 이후엔 인물이나 자연의 사실주의적 혹은 인상주의적인 표현조차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비유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이해하는 듯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예술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시대의 조류潮流에 맞춰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서 음악계에도 새로운 조류가 나타난다. 18~19세기의 약 200년 가까이 서양 고전 음악의 이론적 바탕이자, 모든 기악곡의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조성(tonality, 음악에서 으뜸음에 의하여 질서와 통일을 가지게 되는 여러 음의 체계적 현상)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온음음계를 사용한 드뷔시Claude Debussy(1862~1918)의 인상주의 음악을 시작으로, 전통적인 조성음악을 비판한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1874~1951)는 결국 조성의 구속을 당하지 않는 무조음악無調音樂을 만들어 낸다. 난해한 현대음악 시대가 시작한 것이다. 이후 거의 모든 작곡가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법에서 탈피해 새로운 음악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답게 헬싱키 시내에는 시벨리우스공원이 있다.
그렇지만 시대적 흐름에 역행해 고전적 형식의 틀 속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곡가들도 있다. 핀란드의 국민음악가로 생전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벨리우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드뷔시, 쇤베르크 등과 비슷한 시기에 핀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시벨리우스Jean Sibelius(1865~1957)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한때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지녔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원한 가족들의 권유로 헬싱키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청강생으로 음악 공부를 병행한 그는 결국 음악가의 길을 택해 24세에 헬싱키 음악원을 졸업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1892년(27세)에 귀국한 시벨리우스는 모교인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핀란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 ‘쿨레르보 교향곡’ 교향시 ‘전설’ ‘투오넬라의 백조’ 등을 발표해 일약 핀란드 국민음악가로 추앙을 받기 시작했고, 특히 1899년(34세)에 발표한 교향시 ‘핀란디아’는 핀란드의 광활한 자연과 민중의 투쟁 정신을 고취하는 듯한 선율로 애국심에 불을 지폈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에 의해 자치권을 박탈당하는 위기에 처했기에 일련의 시벨리우스의 작품들은 핀란드 저항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음악이 되었고, 시벨리우스는 30대 초부터 정부로부터 종신연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교직 생활을 접고 작곡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이후 7개의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 명곡을 남겼고, 생전에 전 유럽과 미국 등 세계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현대음악의 흐름 가운데, 시벨리우스는 고전적인 형식을 지키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펼쳐냈다.
시벨리우스는 1957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알고 있는 작곡가 중에서는 가장 장수한 작곡가이다. 후기 낭만주의 시대를 거쳐 현대음악이 주류였던 20세기 전반부까지 살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후기 낭만파 스타일의 음악이 아니고 현대음악은 더더욱 아니다. 초기의 작품들은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나 점차 시대를 역행해 베토벤 시대의 고전적인 수법으로 민족적 색채가 짙은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나타냈고, 1924년(59세)에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 그리고 2년 후인 1926년(61세)에 발표한 교향시 ‘타피올라’를 끝으로 30년간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시벨리우스가 작곡을 중단한 이유를 밝히지 않아 음악평론가들이나 애호가들은 제각기 해석하기도 했다. 이미 충분한 종신연금을 받고 있기에 작곡에 대한 열의가 없었을 수도 있고, 고전파 시대의 소나타형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의 교향곡을 구상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중단했을 수도 있다.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은 20세기 초엽부터 음악계에 불어닥친 현대음악에 대한 거부감, 그로 인해 자신은 시대에 뒤떨어진 작곡가라는 인식으로 인해 자신감을 상실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시벨리우스는 드뷔시나 쇤베르크처럼 새로운 음악세계를 창조한 작곡가와 비교했을 때 음악사적인 평가는 높지 않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작품의 가치로 볼 때는 동시대 현대음악가들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주되는 횟수는 훨씬 더 많다. 그가 남긴 7개의 교향곡은 모두 명곡으로 꼽힌다. ‘베토벤 이후 가장 뛰어난 교향곡 작곡가’라는 평을 남긴 평론가도 있다. 물론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등을 생각하면 언뜻 수긍이 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과 동일 선상에 위치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7개의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고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은 2번이다.
시벨리우스의 작품에서는 북유럽 특유의 자연풍경을 연상할 수 있다.
1899년(34세)에 교향곡 1번과 교향시 ‘핀란디아’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시벨리우스는 3년 후 두 번째 교향곡을 발표한다. 1번과 같은 고전적 형식으로 작곡했지만, 작곡가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완성도가 높다. 묘사적인 음악은 아니지만 1, 2악장은 북유럽의 대자연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와 민요풍의 가락이 시벨리우스만의 낭만적인 개성을 드러내며, 3, 4악장은 투쟁을 통해 쟁취한 승리의 외침을 그려내는 듯하여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1악장) 전통적인 소나타형식으로, 목관으로 제시되는 주선율이 나타나기 전에 현악기로 반주에 해당하는 선율을 먼저 내세운다. 이어 전개되는 민요풍의 선율들은 북유럽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그려내는 듯 광활하면서도 목가적인 분위기를 그려낸다.
(2악장) 안단테의 빠르기로 다소 느리게 전개된다. 1악장과 대비해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수에 차 있다. 핀란드의 겨울 풍경을 그려내는 것 같기도 하고,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인 핀란드인의 침통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듯 쓸쓸하고 우울하다.
(3악장) 스케르초 특유의 빠르고 경쾌한 악장이나 중간에 잠시 나타나는 오보에의 부드러운 선율은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다시 빠른 속도의 불안한 분위기에 긴장감이 감돌다가 쉬지 않고 4악장으로 넘어간다.
(4악장) 알레그로 빠르기의 승리의 찬가다. 3악장의 불안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감동이 벅차오르는 환희의 악장이다. 베토벤 운명교향곡 4악장의 승리에 찬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중간에 민요풍의 우울한 선율이 분위기를 잠시 가라앉히는 듯하나, 다시 차분하고 평화롭게 시작되는 승리의 선율이 점차 고조되면서 금관의 우렁찬 함성에 모든 악기들이 합세해 힘찬 환희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 음악 들어보기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Sibelius, Symphony No.2 in D major, Op.43
비엔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Vienna Philharmony Orchestra, Leonard Bernstei
-1, 2악장
-3, 4악장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