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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1-07-07

시간의 잔고 관리



이따금 쉴새 없이 흘러가는 초 단위 시계를 볼 때면 덜컥 조바심이 들곤 한다. 의지에 상관없이 삶을 좌우하는 평생의 불가항력. 하지만, 마음을 열고 예비한다면 시간은 무엇보다 삶을 빛나게 하는 소중한 재산이다.


어느 날 통장을 열어봤는데 잔고가 눈에 띄게 줄어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잔고가 넉넉하면 마음이 편하고 바닥이 나면 불안하다. 돈은 벌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다. 혹 횡재를 만난다 해도 스스로 모으지 않은 것은 쉬 없어지게 마련이고, 일단 쓰기 시작하면 봇물 터지듯 순식간에 바닥이 난다. 이렇듯 돈 모으기가 어려우니 돈을 귀히 여긴다. 시간은 어떨까? 황금, 소금, 지금 중에서 지금이 제일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시간을 돈만큼 잘 관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시간 잔고는 늘 넉넉한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꼬박꼬박 새로운 24시간이 생기니 늘 충분한 듯하다. 내일은 참 고마운 것이다. 오늘 조금 모자라도 내일이 있으니 괜찮다. 그런데 내일의 고마움을 느끼고 사는 이는 몇 안 된다. 또 모든 이들이 내일을 맞는 것도 아니다. ‘잘 자요. 내일 또 만나요’라는 인사들을 참으로 무심히 내뱉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지인의 부고를 전해 들을 때는 ‘왜 어제 그를 만나 안아주지 못했을까’ 하며 가슴을 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동안 무엇을 할까. 2001년 미국 911테러 때, 생사를 가르는 몇 분 사이에 많은 이들이 한 일은 가족에게 연락해서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남은 이들에게는 두고두고 위로가 된다. 성경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있다. 부자는 생전에 거지 나사로를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둘 다 죽은 후엔 거지는 아브라함 품에, 부자는 음부(지옥)에 갔다. 부자는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그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 형제들이 자기처럼 고통당하지 않도록 권해 달라고 청했지만 아브라함은 살아있을 때도 충분히 들을 기회가 있다며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심지어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 다소 낭만적이기도 하다. 버킷리스트라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정해 두고 세계 일주나 맛집 탐방을 떠올리곤 한다. 죽고 나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인데 말이다. 알고 보면 죽음은 삶에서 그리 멀지 않다. 죽고 싶은 그 순간이 삶의 귀함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음에 관한 한 순서도 없고 시와 때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긴 여정의 종착지와도 같아서 각자 이 땅에 태어난 이유와 사명을 다할 때 맞이하는 순간이다. 삶을 고귀하게 다루려면 죽음을 조금 더 근접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잘 준비해야 한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잘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돈도 지켜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지킬 수 있고 삶 또한 그렇다. 아직 건강하고 여유 있을 때 준비해야 하고, 와병 중이거나 기력이 쇠하면 그것도 힘들다.


유산으로 남겨야 할 것은 단지 돈이 아니다. 상속으로 남기는 돈은 약간의 덤이다. 남은 자들에게 더 나은 것은 그 상속재산이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삶이다. 상속재산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삶은 얼마 안 가서 도로 피폐해질 것이다. 돈이 상속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상속재산은 작은 선물이 될 수 있지만, 스스로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더 나은 선물이다. 내 죽음을 가장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이들은 분명 가족이다. 그런데, 말하지 않으면 평생 가족들을 위해, 잘 살기 위해, 더 많이 벌기 위해 애쓰고 견디고 버텨온 그 수많은 삶의 곡절을 가족들은 잘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만들지 않는다면 서로를 응원하고 축복하며 인생 역전의 이야기를 전할 시간은 오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꼭 남기고 싶은 인생 스토리인데 말이다.




최근에 ‘나는 새해가 되면 유서를 쓴다’라는 책을 썼는데, 제법 관심을 가져준다. 가끔 북 콘서트를 하면 정말 매해 유서를 쓰는지, 왜 쓰는지 묻는 이들도 있다. 유서는 언제 죽더라도 덜 아쉽게 떠날 수 있도록 하는 준비이다. 그런데, 기실 나는 아직 죽을 준비는 덜 되었다. 내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해서 내 가족들과 지인들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죽음의 문제가 나만의 일이 아니기에 남는 이들이 겪을 일을 생각해보고, 아직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을 때 최선의 배려를 해 주고 싶다. 유서는 단지 ‘최종 전언’이 아니다. 유서를 쓰다 보면, 내 삶과 가까운 이들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감사할 거리를 남기고 싶고, 남은 이들이 나를 대신해서 해 주어야 할 일들을 알려주고 싶고, 그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고 자랑거리인지 말해주고 싶다. 반대로, 남기지 않으면 좋을 것들도 있다. 삶의 허무함이나, 해결하지 못한 문제와 부채, 아쉬움과 후회, 산소호흡기를 달지 결정하도록 하는 것들.


이렇게 유서를 쓰다 보면, 얼마가 될지 모를 내 삶을 군더더기 없이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자기중심적 인간이라고 비문에 쓰이기보다는 배려심 있고 누군가를 도우면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기억되면 좋겠다. 적신으로 와서 주신 인생 잘 살고, 얼마 정도 남은 돈도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가족들에게도 얼마 정도는 남겨주고, 일부는 나보다 처지가 어려운 이를 돕거나 사회에 꼭 필요한 곳에 쓰이도록 하면 남는 이들도 보고 배우는 것이 생기고 부모의 뜻을 기리며 집안의 좋은 전통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최종 평가와 정리를 하지 않으면 무엇을 했는지 흔적이 남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제든 여유가 있을 때 내 삶의 써머리를 써보면서 ‘참 잘 살아온 인생’을 적어보자.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

국내 제1호 고액모금 전문가이자 레거시 디자이너. 행정안전부 기부심사위원, 사회연대은행 이사, 대한적십자사 회장 특별보좌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대학교, 건국대학교, 월드비전을 거치면서 고액 모금과 캐피탈 캠페인 등으로 총 5천억 원을 모금한 바 있다. 이밖에도 수많은 자산가들과 뜻있는 사람들의 유산 상속과 기부를 컨설팅했고, 현재는 건강한 기부 문화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모금가협회(KAFP)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