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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제대로 읽은 한 권이 더 낫다는 말이 있다. 음악도 제대로 들은 한 곡이 오래도록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여기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클래식, 베르디의 오페라를 소개한다.
베르디 :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Verdi : Opera 'La Traviata'
한번 읽었을 뿐인데 유독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소설들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형 집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서가에서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춘희’, 다소 촌스러운 느낌이 나는 제목이었지만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이기에 읽기 시작했고, 눈물 흘리며 책장을 덮었을 땐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2악장의 선율이 가련한 여주인공의 죽음과 오버랩 되어 10대 후반 청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요즘엔 일본어 제목인 ‘춘희椿姬’ 대신에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이라는 제명을 사용한다. 소설 속 주인공 마르그리뜨 고띠에는 실존 인물이다. 마리 뒤플레시스(Marie Duplesis,1824~1847), 프랑스 노르망디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5살에 파리로 이사한 후,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다 한 저명인사의 정부情婦가 되면서 파리 사교계에 모습을 나타냈다. 타고난 미모에 점차 교양을 쌓아간 그녀는 막대한 후원금을 바탕으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살롱(salon, 작가, 예술가들의 사교 모임)의 주인이 되었다. 살롱을 드나들던 동갑내기 젊은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와 잠시 연인이 되기도 하고, 한때 작곡가 리스트의 정부였다고도 전해진다. 귀족과 결혼했지만 23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fils, 동명의 소설가인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 아들 뒤마Dumas Fils 로 불리기도 한다)는 마리 뒤플레시스와의 짧은 연애담에 픽션을 더해 1848년에 ‘동백꽃 여인’이라는 제명의 소설을 발표했고, 마리는 사후 1년 만에 마르그리뜨 고띠에Marguerite Gautier라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리고 1853년에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Violetta라는 불멸의 이름을 또 하나 얻었다.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결혼한 지 4년만인 1840년에 두 자녀에 이어 아내마저 떠나보낸 후 창작 의욕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의뢰받은 오페라의 공연 결과도 실패로 끝나 한때 음악가의 길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 절망 속의 베르디를 구해낸 작품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유명한 ‘나부코Nabucco’였다. 베르디의 최초 성공작으로 1842년 초연 시 프리마돈나였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이후 평생을 함께 한 동반자가 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베르디는 ‘에르나니 (Ernani, 1844년)’, ‘맥베스(Macbeth, 1847년)’ 등을 연이어 발표해 이탈리아에서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87세까지 장수한 베르디가 남긴 오페라는 30여 편에 이른다. 이 중 작품성이 가장 뛰어난 오페라 하나를 선정해 보라고 하면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한편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라 트라비아타’를 선택할 것 같다. 1948년 한국에서 국내 성악가들에 의해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 역시 ‘라 트라비아타’였다.
1852년 파리에서 39세의 베르디는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을 대본으로 한 연극 ‘동백꽃 여인’을 관람한 뒤 오페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 2년 전 대성공을 거둔 작품 ‘리골레토’의 대본 작가에게 의뢰해 이듬해 1월 오페라 대본을 받은 즉시 작곡에 착수해 불과 4주 만에 3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완성했다.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이탈리아어로 ‘타락한 여인’ 또는 ‘탈선한 여인’ 등을 의미한다. 20대 초반에 파리 화류계의 꽃이 된 여인 비올레타는 부유한 아버지를 둔 시골 청년 알프레도의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인 후, 화류계를 떠나 한적한 교외에서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와 아들과의 이별을 강요하고, 결국 비올레타는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알프레도 곁을 떠나 다시 화류계 생활로 돌아간다. 내막은 모른 채 강한 배신감을 느낀 알프레도는 파리의 파티장에 나타나 비올레타에게 심한 모욕을 준다. 뒤늦게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알프레도가 비올레타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병마로 쇠약해졌고, 사랑의 힘으로 기력을 회복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알프레도의 품에 안긴 채 죽음을 맞이한다.
(제 1막)
-축배의 노래 (알프레도, 비올레타 이중창 및 합창)
친구로부터 비올레타를 소개받은 알프레도가 파티 시작 전 축배의 노래를 선창한다. 사랑의 감정을 담은 알프레도의 노래에 이어 비올레타가 화답한다. “사랑은 덧없으니 이 순간의 쾌락을 즐기자”라는 내용으로 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사랑에 대한 다른 시각을 암시한다.
-빛나고 행복했던 어느 날 (알프레도, 비올레타 이중창)
모두 춤을 추기 위해 무도장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창백한 얼굴의 비올레타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아 쉬겠다고 한다. 알프레도는 곧바로 되돌아오고, 비올레타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진심 어린 사랑을 고백한다. 1년 전부터 사랑해 왔다는 알프레도의 말에 자신은 그런 사랑의 감정을 모른다고 비웃지만 결국 동백꽃을 건네주며 내일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아, 그이인가 (비올레타)
홀로 남은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사랑 고백에 혼란을 느낀다. 진실한 사랑과 현실의 쾌락 사이에서 망설이며 기쁨과 고통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아리아를 부른다. 10분 가까이 독창으로 부르는 난이도가 높은 아리아로 프리마돈나의 연기력과 음악성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곡이다.
(제 2막)
-그녀 없이는 행복도 없네 (알프레도)
파리 근교의 시골집에서 비올레타와 3개월째 함께 살고 있는 알프레도는 그녀와 함께하는 행복한 삶을 노래한다.
-이중창 (제르몽, 비올레타)
알프레도가 외출한 사이에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방문한다. 알프레도와의 동거생활을 위해 전 재산을 투자한 비올레타의 희생과 사랑을 확인한 제르몽이지만 딸의 혼사를 앞둔 가정의 명예를 위해 아들과 헤어져 달라는 부탁을 하고, 비올레타는 비통한 심정으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다. 20분 가까이 연주되는 바리톤과 소프라노의 이중창으로 비극의 시작점이다.
-프로방스의 바다와 육지 (제르몽)
비올레타가 떠나면서 남긴 이별의 편지를 읽고 있는 알프레도 앞에 아버지 제르몽이 나타나 프랑방스의 고향집으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며 부르는 바리톤 아리아의 대표적인 명곡이다. 그렇지만 실의에 빠져있는 알프레도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제 3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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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이여 안녕 (비올레타)
뒤늦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알프레도가 도착할 거라는 소식을 접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죽음을 예감한 비올레타는 “너무 늦었다”라고 비통하게 울부짖고, 이어 “안녕, 행복했던 지난 날이여...” 로 시작하는 절망적인 아리아를 노래한다.
알프레도가 도착하자 잠시 기운을 차린 비올레타는 열정적인 포옹과 함께 기쁨에 찬 이중창을 함께 부르지만 곧 쓰러지고, 의사와 함께 제르몽도 도착한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건네며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초상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몇 마디 유언을 남기고 알프레도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베르디는 역사적 영웅들의 장엄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나 ‘맥베스’나 ‘오텔로’ 등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오페라의 주요 소재로 담아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비통하다. ‘라 트라비아타’ 역시 비극적인 줄거리를 담고 있지만 비극의 성격은 다르다. 삼각관계나 질투와 시기, 복수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른 오페라들과 달리, 동시대 평범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줄거리도 단순한 편이며, 극적인 요소나 음악성으로 볼 때 베르디의 다른 오페라보다 우위에 있는 작품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실존했던 가련한 여인의 삶과 사랑 이야기가 아름다운 아리아를 통해 전해지는 감동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 음악 들어보기
베르디 :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Verdi : Opera 'La Traviata'
라 트라비아타 전곡, 2005년 잘츠부르크 실황
제 1막 아, 그이인가..
소프라노 조수미
제 3막 지난 날이여 안녕, 소프라노 조수미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