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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2021-06-19

작업은 정상화처럼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여 꾸준히 걸어온 이에게 오랜 세월은 무엇보다 강한 무기다. 게다가 나이듦과 타협하지 않고 열정을 빛내는 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6월 전시 정상화 개인전은 아흔 된 작가의 지난한 시간과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드디어 정상화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정상화>를 열었다. 한국 단색조 추상을 대표하는 정상화 작가의 올곧은 작가 정신을 많은 대중이 지금이라도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다. 9월 26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의 한 켠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8년 전 대구 우손갤러리에서 열린 정상화 작가의 개인전 당시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자료를 리서치하고 인터뷰 질문지를 준비하면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정상화 작가는 그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나?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에 있어서 정상화 작가만큼 독창적이고 작가정신이 투철한 작품을 선보인 작가도 흔치 않았기에, 그 궁금증을 그냥 묻어둘 수 없어 노장을 앞에 두고 그 질문을 결국 던지고 말았다. 당시 정상화 작가의 말을 요약해 옮겨보자면 이렇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자는 제안을 받고(지금으로부터 치자면 약 20년도 훨씬 더 된 이야기다) 절차를 논의하던 중 전시 비용의 많은 부분이 작가 부담으로 된 것을 알고 정상화 작가가 전시를 고사했다는 것. 당시 미술관들은 국가에서 지원받기 어려웠던처라 도록 제작이나 작품 운송 비용 등을 작가가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정상화 작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작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것. 그렇게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회고전 기회는 한낱 꿈처럼 날아갔다. 사실 이 사건은 그간 미술계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일 중 하나로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정도로 이슈였는데 이렇게 그의 개인전 소식을 들으니 유독 반가울 수 밖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정상화> 개인전 포스터.



무제, 1987,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97cm. 개인 소장. 사진 이만홍.


이번 전시는 올해 90세가 된 정상화 작가의 화업을 총망라하고 한 눈에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작가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 후 교편을 잡으면서도 1960년 <현대작가초대전>, 1962년 <악뛰엘 그룹전> 등 여러 전시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1965년엔 파리 비엔날레, 1967년엔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 작가로 출품하며 이미 글로벌 아트 세계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작가의 꿈을 키워오던 그는 결국 후 홀로 파리 유학을 떠나겠다고 결심했고 파리와 일본 고베, 그리고 다시 파리로 옮겨 작업활동을 하다 1992년 영구 귀국해 1996년 여주에 작업실을 마련한 후 지금껏 그곳에서 작업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오랜 세월만큼 그의 작품도 시기별로 경향이 뚜렷한데 특히 그의 파리 거주 시절 작품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인생을 통 털어 가장 심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였기 때문. 그가 1967년 파리로 유학을 떠난지 1년 만에 아내가 유방암 말기를 선고받았고,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에게 아내는 오히려 다시 빨리 떠나 파리에서 예정되어있던 전시회를 치르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는 아내의 병을 두고 차마 파리까지 떠날 수가 없어 대신 한국과 가까운 고베에 1969년부터 자리를 잡고 공부하며 전시회를 열었다. 머지않아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망연자실해 있는 그를 다그쳐 다시 1977년에 그를 파리로 떠나게 한 건 장모님. 아이들을 장모님께 맡기도 떠났을 그의 무거운 발걸음과 이방인으로서 힘겹게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가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통과 인내를 우리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올해 90세에 접어든 정상화 작가. 그는 미술계에서 점잖은 인품덕에 ‘선비’로 통한다/ 사진 이만홍.


정상화 작가를 최근 알게 된 관객이라면 그의 작업이 흰색, 파란색, 검은색 등의 단색화 작업이 전부일 거라 생각한다. 최근 그의 개인전이나 그룹전에서 많이 소개된 작품이 대부분 1990년대 이후의 단색 작업으로 정상화식 수행적 작업 과정을 거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날 그의 작업은 1953년 초기 작업부터 최근까지의 작업, 즉 판화와 드로잉, 데콜라주(사물을 찢거나 불태우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연한 효과를 기대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미적 현상을 찾고자 하는 시도), 프로타주(대상물 위에 놓은 종이를 연필 등으로 문질러 모양을 내는 기법) 등 다양한 기법으로 평면 작업의 한계를 넘어선 작업들이 많아 감상할 거리가 더욱 풍부하다.



작품 64-7, 1964,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작품 65-B, 1965, 캔버스에 유채, 162×130.3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사진 이만홍.


전시는 총 5개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3년부터 1968년까지 학업과 작품활동이 이어지는 시기, 작가가 일본 고베에서 활동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단색조 추상으로의 전환이 시도된 시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종이를 이용해 재료와 기법을 탐구하며 프로타주 직업을 선보인 시기, 이후 1992년까지 고베에 이어 파리에 머물던 시기,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1992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 등 총 5개의 시기로 나누어 작품을 배치해 정상화 작가의 작업 세계를 보다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동선을 짰다. 앞서 설명했듯, 1년 남짓 파리에 머물다 고베로 건너가 체류했던 8년의 기간, 그리고 다시 파리로 떠나기까지의 그 시기는 그의 작품 세계에 있어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보인 시기다. 부인의 투병, 그리고 사별로 이어지는 큰 고통과 이후 자녀들을 한국에 남기고 작업을 위해 홀로 먼길을 떠나야먄 했던 아비의 가슴아린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작업에도 나타난다. 이 시기에 그는 스스로 다양한 기법을 시럼하고 엥포르멜 화풍에서 벗어나 단색화로 전환하기 이른다. 작업 초기의 기하학적 도형의 사용이 줄고 백색 위주의 단색조 회화가 다수 제작된 것도 이때. 무엇보다 정상화를 대표하는 격자형 구조도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거기엔 이런 사연이 있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하기 위해 방문했던 브라질에서 네모난 작은 돌로 넓은 대로를 메우고 있던 노동자의 모습을 본 것. 당시 조형적 변화를 겪던 그는 이 광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리드 기법을 시도하게 됐고 그것은 지금껏 정상화를 대표하는 작업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작품 G-3, 1972, 캔버스에 유채, 190×13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무제 74-F6-B, 1974, 캔버스에 유채, 226×18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서스테인 웍스.



무제 85-7-1, 1985, 캔버스에 아크릴릭, 163×97.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상화의 작업을 대표하는 그리드 작업 방식을 들여보다면 마치 성직자의 수도 과정과 같음을 느낄 수 있다. 과정은 이렇다. 물에 섞은 고령토를 3~4mm 두께로 골고루 펴 바른 후 적당히 마르면 캔버스 천을 나무틀에서 떼어내 캔버스 뒷면에 자를 대고 가로, 세로의 규칙적인 선을 긋는다. 끌을 이용해 그 연필 선을 꾹꾹 눌러가며 캔버스를 접었다가 펼치면 표면에 그물처럼 수많은 사각형의 균열이 생기는데 수많은 사각 면의 고령토 조각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아크릴 물감 채우는 것이다. 사각형 하나하나를 많게는 6번까지 채우다보니 적게는 8000번에서 수만 번 이 과정을 거치게 된다. 모두 크기와 부피가 조금씩 다른 이 수많은 사각형들은 서로 이웃하며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를 통해 비로소 존재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무제 95-9-10, 1995, 캔버스에 아크릴릭, 228×18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무제 07-09-15, 2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259×19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무제 2019-10-15, 2019, 캔버스에 아크릴릭, 259.1×193.9cm. 작가 소장. 사진 이만홍.


2010년 단색화 붐이 일면서 정상화 작가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지만 여전히 이우환, 박서보, 김창열, 윤형근 작가에 비해 뒤늦게 알려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90세의 나이에 이제 회고전을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한 관객은 작가가 보여주는 극한의 노동 집약적 행위에 진심어린 존경을 표할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을 조수하나 없이 90세의 노작가가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 그렇다.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김이신 <아트 나우>편집장

<아트 나우>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