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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의도치 않아도 즐거운 것이 있다. 클래식 중에도 유난히 듣는 재미가 있는 곡이 있어 추천한다. 꾸밈 없이 살아가는 모습만으로 인간에게 여러 깨달음을 주곤 하는 동물이 바로, 이 곡의 주인공이다.
생-상스 : 동물의 사육제 Camille Saint-Saëns : Carnaval des Animaux
동물들의 꾸밈없는 행동과 살아가는 모습들을 즐겨 본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요일 오전엔 어김없이 SBS방송의 TV동물농장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인간과 동물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 듣다보면 훈훈한 감정과 연민이 교차되는 묘한 감정이 일기도 한다. 동물이 없는 사람들만의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삶은 동물들과 함께 했다. 만 오천년 전 구석기 시대의 라스코 동굴이나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들은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예술적 대상이기도 했고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회화 속에 남겨진 동물들은 다양하고 작품수도 많다. 하지만 음악 속에 남겨진 동물들의 모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미술이 공간과 시각적인 예술인 반면, 음악은 시간과 청각적인 예술이기에 아무래도 음(音,소리)으로만 동물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은 어렵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속의 뻐꾸기나 나이팅게일의 노래, 슈베르트의 피아노 오중주 ‘송어’, 쇼팽의 ‘강아지 왈츠’, 그리고 차이코브스키의 ‘백조의 호수’ 등의 음악들이 떠오르지만 그 제목의 동물들은 음악의 한 형식 속에 잠깐 드러나는 상징적인 것일 뿐이다. 서양음악 사상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과 행동을 음악으로 표현해 낸 작품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가 유일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는 모차르트 못지않은 신동이었다. 3살에 피아노를 배우고, 5살에 작곡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10살 조금 지난 1846년에 공개연주회를 열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암보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16살에 파리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생-상스는 이후 파리의 대형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고, 불과 26세의 나이에 음악학교 교수로 임명되는 등 음악가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굳혀갔다.
이 무렵 유럽 음악의 중심지는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이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음악계는 오페라 등 극음악들이 주류를 형성했고,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 순수음악에 대한 관심도는 지극히 낮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프랑스 음악계는 관현악단들을 창설하거나 재정비 해 가면서 기악곡 부흥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1871년, 36세의 생-상스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국립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포레, 프랑크, 랄로 등 동시대 프랑스 음악가들과 함께 기악곡 위주의 작품발표회를 개최하는 등 프랑스 음악계를 주도해 나갔다.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생-상스의 대표적인 기악곡들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김연아의 쇼트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쓰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독 친근한 곡인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도 그 중 한 작품이다.
생-상스는 유독 여행을 좋아했다. 86세의 나이에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여행 중 폐렴으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 유럽 내 여러 국가는 물론 미국, 남미,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연주 또는 여행을 목적으로 돌아다녔다. 1886년(51세)엔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연주여행을 떠났지만 독일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쓴 적이 있는 생-상스에 대한 거부감으로 연주여행은 순탄치 못했다.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첼리스트cellist인 친구가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당시 마을에서는 사육제carnival가 준비 중이었고, 생-상스는 친구가 주최하는 사육제 마지막 날 음악회를 위해 참신한 음악을 구상했다. 사람들의 축제 마지막 날, 동물들이 사육제를 즐기는 모습을 음악을 통해 그려낸 것이다. 형식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동물들의 특성에 맞게 악기들을 자유롭고 교묘하게 구성해 작곡한 ‘동물의 사육제Carnaval des Animaux’는 음악사적 가치나 작품성으로 볼 때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생-상스 작품 중 가장 친근하고 유명한 곡임에는 틀림없다.
(제 1곡) 서주와 사자 왕의 행진 - 두 대의 피아노와 현악 합주
두 대의 피아노가 트레몰로(tremolo, 음이나 화음을 빨리 규칙적으로 떨리는 듯이 되풀이하는 주법)로 시작하여 힘차게 행진곡 풍의 서주를 연주한 후, 현악기들이 사자의 늠름한 주제를 표현한다. 사자의 포효가 위압감을 주지만 우스꽝스런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제 2곡) 암탉과 수탉 - 두 대의 피아노,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와 현악으로 수탉을, 클라리넷으로 암탉을 묘사하는 듯하다. 다투는 것인지 사랑싸움인지 모르지만 한가롭지는 않다.
(제 3곡) 당나귀 - 두 대의 피아노
피아노로만 연주되는 프레스토의 빠른 곡이다. 16음표만으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당나귀의 행동을 그려낸다. 야성적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제 4곡) 거북이 - 피아노, 현악 합주
피아노와 현악이 함께 안단테의 속도로 거북이의 느린 행동을 묘사한다. 오펜바흐의 유명한 캉캉 춤 멜로디를 아주 느리게 편곡해 빠르고 경쾌한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그려낸다.
(제 5곡) 코끼리 -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피아노의 왈츠 리듬에 맞춰 묵직한 저음의 콘트라베이스가 코끼리가 춤추는 모습을 연주한다. 코끼리의 주제는 선배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바람 정령의 춤’을 편곡했다. 요정이 코끼리로 둔갑한 것이다.
(제 6곡) 캥거루 - 두 대의 피아노 피아노
두 대로 캥거루를 묘사한다. 꾸밈음으로 리듬감을 살려 긴 뒷다리만으로 어색하게 뛰어다니는 캥거루의 모습이 잘 연상된다.
(제 7곡) 수족관 - 플루트, 첼레스타, 두 대의 피아노, 현악 합주
물의 움직임을 그려내는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선율을 배경으로 타악기인 첼레스타와 플루트가 환상적인 음색으로 수족관 물고기들의 유연한 움직임을 묘사한다.
(제 8곡) 귀가 긴 등장 인물 - 바이올린
등장 인물들personnages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당나귀나 노새를 표현한 것 같다. 제 3곡의 당나귀가 야생 당나귀라면 이 곡은 유순하고 길들여진 당나귀인 것으로 보인다. 바이올린 합주로만 익살스럽게 묘사돼 귀가 여린 사람들을 빗대어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제 9곡) 숲 속의 뻐꾸기 - 두 대의 피아노, 클라리넷
두 대의 피아노가 잔잔한 화음으로 숲 속의 정경을 묘사하고, 클라리넷이 뻐꾸기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아주 단순한 곡조들의 반복이지만 아늑하고 차분한 숲 속 분위기가 감돈다.
(제 10곡) 큰 새장 - 두 대의 피아노, 플루트, 현악 합주
다양한 새들이 모여 있는 커다란 새장 안의 광경을 그려냈다. 피아노와 현악, 그리고 플루트로 크기가 다른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습을 경쾌하고 화려하게 보여준다.
(제 11곡) 피아니스트 - 두 대의 피아노, 현악 합주
피아니스트를 동물들 집단에 포함시켰다. 두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매우 서툴다. 연습곡을 되풀이 하지만 박자도 틀리고 템포도 엉망이다. 점점 좋아지기는 한다. 아마도 무능한 피아니스트들을 동물에 빗대어 조롱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제 12곡) 화석 - 두 대의 피아노, 클라리넷, 실로폰, 현악 합주
화석도 동물 집단에 포함시켰다. 익숙한 곡조들이 들린다. 실로폰으로 연주하는 곡은 생-상스 자신의 작품 ‘죽음의 무도’ 중의 해골을 묘사한 가락이다. 프랑스 동요 ‘반짝 반짝 작은별’ 주제도 잠시 나타나며, 클라리넷은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의 아리아를 연주하기도 한다. 익숙한 멜로디들을 화석으로 상징화시킨 의도는 잘 파악하기 어렵지만, 아마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존재할 음악들을 살짝 드러낼 의도는 아니었을까?
(제 13곡) 백조 - 두 대의 피아노, 첼로 독주
동물의 사육제 전 14곡 중에서 뿐 아니라 생상스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명곡이다. 다소 풍자적이고 익살스러운 앞의 곡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곡이다. 우아한 백조가 미끄러지듯 헤엄쳐 다니는 모습이 쉽게 연상된다.
(제 14곡) 피날레 - 모든 악기
동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사육제를 즐긴다. 잠깐씩 각 동물들의 주제가 연주되고 흥겨운 축제는 절정에 다다른다.
자칫 클래식은 길고 지루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이곡은 부담 없이 추천할 만하다. 전체 14곡으로 구성된 모음곡이지만 총 연주 시간은 20분 남짓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을 상상하면서 들어보는 음악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때론 짓궂기도 하지만 쉽고 재미있어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회에서도 가장 많이 연주된다. 평년보다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진 5월의 끝자락. 누구에게라도 함께 들어보자고 해도 좋을 명곡으로 마무리해 보시길 바란다.
♪ 음악 들어보기
생-상스 : 동물의 사육제 Camille Saint-Saëns : Carnaval des Animaux
2014년 일본 연주 실황, 마르타 아르헤리치, 기돈 크레머 등
동물들의 사진을 보면서 듣는 ‘동물의 사육제’ 영상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