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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1-05-19

천재의 드로잉



드로잉이라는 장르로 당당히 현대미술에 도전장을 내밀며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김정기 작가. 이름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만화와 회화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은 관객을 놀랍도록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김정기, 디아더사이드 | Kim Junggi, The Other Side>를 소개한다.



‘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미학을 보여주는 드로잉의 대가 김정기는 2001년 KTF의 간행물 를 시작으로 2002년 <영점프>에 ‘퍼니퍼니’를 연재하며 에술계에 얼굴을 내민 작가다. 특히 그의 이름 석 자를 알린 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연재된 네이버 웹툰 . 놀라운 드로잉 실력과 스토리 작가였던 박성진의 탄탄한 이야기 전개로 이 작품은 마니아층을 확보하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그가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15년 카이카이키키(Kaikai Kiki)의 개인전, 그리고 일본의 팝아트 작가인 무라카미 다카시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주스타 포즈X슈퍼플랫>전에 그의 작품이 연달아 소개되면서부터. 2016년에는 바스티유 디자인 센터에서 열린 자신의 파리 첫 개인전에서 큰 인기를 쓸며 유럽 미술계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자신의 기억 속 이미지를 완벽한 테크닉과 탄탄한 서사구조를 통해 구현하는 라이브 드로잉 장르를 탄생시킨 김정기 작가. © 2021 Kim Junggi


여러 장르를 망라하는 그의 드로잉은 때론 동화적이기도 하지만, 만화와 드로잉을 비롯해 대형 회화 작품과 영상, 사진 등에서 느껴지는 터치는 섬세하면서 남성적인 분위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어 그에겐 유독 남성 팬들이 많다. 무엇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그 경험이 만들어낸 삶의 더께,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고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화면에 쏟아내는데, 이 대부분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드로잉의 미술사적 개념을 넘어선 라이브 드로잉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켜 전시장에서 관중 앞에서 직접 드로잉 쇼를 펼쳐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동시에 유려한 드로잉을 완성해 나가는 모습은 실로 경이롭다. 물론 이번 롯데뮤지엄 전시에서도 라이브 드로잉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Life _ Death, Heading towards a Future Somewhere, 2018, Ink on paper, 147 × 256 cm, © 2021 Kim Junggi


이번 전시에는 초기 만화 1000여 점 이상의 드로잉과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와 마블 코믹스 협업, 그리고 대형 회화작품까지 약 2000여 점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망라했다. 전시 제목처럼 ‘the other side’, 즉 어떤 이면의 세계로 가는 이정표를 제시하는 시간을 제공한다는 것이 전시의 의미. 총 40년에 걸쳐 커리어를 완성해 온 작가의 그림 이야기를 결산하는 시점이 될 이번 전시에서, 지금 여기에 소개할 몇 가지 대표작들은 김정기 작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Leo _ Taeho, 2011, Graphite, ink, and watercolor on paper, 27.3 × 39.5 cm, © 2021 Kim Junggi


네이버 웹툰에 연재한 의 주인공들. 2001년 만화가로 정식 입문하며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연재한 는 동물을 의인화한 등장인물을 통해 현대사회의 기업 경영과 관련한 비즈니스 이야기다. 이 컷은 주인공인 긴 꼬리 호랑이 태호의 세계정복 일대기를 그린 작품. 동물과 인간, 사물이 혼재하는 표현 방식과 톡톡 튀는 유머 코드를 읽을 수 있다. 작가는 뮤직비디오나 영화, 화보, 만화책 등 시각적인 모든 자료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또한 지금의 드로잉과 회화가 만화를 기초로 했기에 표현이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고백했다.



Heading towards a Future Somewhere, 2011, Ink on paper, 150 × 527 cm, © 2021 Kim Junggi


작가는 유년 시절, 갖고 싶은 물건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머릿속에 계속해서 대상을 연상하고 기억하는 연습을 거치며 지금과 같은 실력을 갖추게 됐다. 소소한 일상과 여행지의 풍경, 회의 중에 일어난 사건, 작가 주변의 인물, 자동차, 도로 풍경 등 작품의 소재가 되는 모든 장면을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이 보았던 풍경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는 것. 이 작품은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라이브 드로잉으로 완성한 것이다. 작가는 이 행사에서 완성된 작품이 아닌 현장에서 직접 작업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로 마음먹고, 부스 전면에 대형도화지를 붙인 후 한쪽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밑그림 없이 작가의 직관대로 그리기 시작했지만, 도화지에 그려진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얼마나 치밀한지 보여주었다. 물론 이때도 관객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을 하며 이 작품을 그려나갔는데 이 과정에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면서 전세계 아티스트들이 기함을 금치 못했다고. 베일 쌓인 그의 실력이 영상으로 낱낱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를 만화가에서 현대미술가로 그 영역을 확장시킨 계기를 마련했고, 드로잉 퍼포먼스라는 ‘과정의 예술’에 관객들이 본격적인 관심을 드러내게 만든 전환점이 되었다.



The Other Side, 2021, Ink on paper, 90 × 60 cm, © 2021 Kim Junggi


작가가 만들어내는 상상 이면의 세계를 주제로 한 작품. 우주 공간에 두 세계가 유영하듯 표현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 놓인 두 인물은 각각 우주복과 잠수복을 입고 있고, 여러 동물, 동화 속에 등장하는 인어가 상하단의 화면을 채우고 있다. 어느 것 하나 공통점 없어 보이는 것들이지만 두 인물이 화면 중간의 핑크색 곰 인형을 서로 맞잡으며 마침내 각각의 세계를 잇는다. 현실과 상상, 그리고 현실 안에서도 조리와 부조리, 앞과 겉, 위 아래 등 상반되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The Sun and the Moon, 2021, Ink on paper, 213 × 150 cm, © 2021 Kim Junggi


유년 시절 아버지가 사주신 스케치북 표지 그림에 매료되어 만화가를 꿈꾸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김정기 작가는 그림의 주제나 소재에 그야말로 한계를 두지 않는다. 신작인 이 작품은 우리나라 대표적 전래동화 <해님달님>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번쩍이는 두 눈과 모든 것을 삼킬 듯 욕망스럽게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 길게 늘어뜨린 호랑이 혓바닥에는 어린 남매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마치 미끄럼틀을 타고 호랑이를 피해 도망가듯 그려져 있다. 우주 비행이 꿈이었던 어린 남매가 호랑이를 피해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는 장면에서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김정기 작가의 그림은 그림 하나하나 뜯어 보는 재미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주제가 되는 해와 달, 남매, 호랑이 외에 전래동화의 배경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거나, 샤넬과 같은 명품을 입은 다른 등장인물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맥도날드 간판을 단 주막으로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 화면을 탄생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재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라이브 퍼포먼스로 유명한 작가의 드로잉 현장을 영상 및 실제로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2021롯데뮤지엄


이번 전시에서 김정기 작가는 롯데뮤지엄 전시장 내부에 10m 길이의 라이브드로잉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2015년도에 ‘개인이 그린 가장 긴 그림’이었던 9m보다 1m 더 긴 10m 작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전시가 막을 내리는 7월 11일까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11~13시, 15~17시), 그리고 4월 24일 이후부터 격주 토요일(14~17시)에 라이브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고 하니 그 시간에 맞추어 전시장을 방문하는 것도 하나의 팁이 되겠다.


사진 제공 롯데뮤지엄

김이신 <아트 나우> 편집장

<아트 나우>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