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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1-04-07

기록할 가치가 없는 삶은 없다



기억을 모아 기록하는 이가 작가라면, 여기에 그 주옥같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바람 잘 날 없는 일상에도 반갑게 찾아오는 봄날처럼 환하고 따뜻한 책들을 만든 장혜원 편집자가 ‘순천 소녀시대’의 글을 엮어 내며 느낀 것들을 전해왔다.


한 명의 사람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실오라기 같은 기억을 조심스레 잡아 빼면 주르륵 풀려 나와 하나 가득 이야기로 펼쳐질 때가 있다. 어떻게 그동안 이 이야기들은 그렇게 주름 속에 꼬깃꼬깃 숨어 있었나 싶다. 흔히들 대단한 사람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별거 없는데'로 시작하는 보통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속에서 더 진한 공감과 감동을 만날 때가 많다.



순천 할머니 스무 분을 작가로 데뷔하게 한 책<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출처: 남해의봄날


2018년 출간한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를 쓰고 그린 스무 분의 작가도 그랬다. 시대가 그러하여 글을 배우지 못했으나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60대에서 80대의 순천 할머니들이다. 남들보다 늦게 글을 익히고 그림을 그리며 환히 웃음 짓는 그분들을 우리는 ‘순천 소녀시대’라고 불렀다. 순천 소녀시대의 글과 그림에는 그 세대가 겪은 익숙한 아픔들이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고부갈등, 여성에 대한 차별, 아픈 자식, 고단했던 가난…. 요약하고 분류하자면 몇 개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서로 다른 결, 무늬가 있다. 익숙함에서 시작해 구체성으로 가는 글은 마음을 흔들곤 한다. 담담하지만 솔직한 글에 개성과 에너지가 넘치는 그림이 더해진 책을 보며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가 함께 울고 웃었다.


그러나 책과 함께 가장 환히 웃었던 이는 스무 분의 작가, 할머니들이었다. 출간기념회를 하는데, 할머니들은 자신감과 의욕이 흘러넘쳤고, 자연스레 다음 꿈을 꾸고 이야기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표정이 정말 소녀 같았다. 물론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책 출간이라는 흔치 않은 일을 경험했기에 기쁨이 더해졌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느꼈다.



'순천 소녀시대'라 불린 할머니들의 글에는 누구보다 담담하고 솔직한 삶이 담겼다. 출처: 순천그림책도서관


2년의 시간 동안, 이분들은 아주 오래전 일부터 최근의 일들까지를 소재로 ‘순천평생학습관 한글작문교실’에서 글을 쓰고 ‘순천그림책도서관’에서 그림을 그렸다. 쓰고 그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을 찾아내 모으고 엮어내는 시간, 그 시간을 충실히 보내면 희미해졌던 시간도 딸려 나온다. 그때의 마음을 떠올리고 거리를 둔 채 의미를 찾고 정리하는 경험은 의도치 않아도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주어지는 선물이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미웠습니다. 학교도 안 보내 주고 술 먹고 노름하고 여자를 집까지 데려와 엄마랑 셋이 함께 잠을 자고 밥상까지 차려 바치게 했습니다. (……)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엄마 산소에 갈 때도 아버지 묘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글을 배우면서부터 조금씩 마음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렸습니다.”

-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아버지’, 손경애 -


스무 분의 할머니가 소녀처럼 보였던 것은 그들이 ‘오늘’을 사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기에 쓰고, 그리고, 기록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지나간 시간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단, 기록하는 일은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그곳에 계속 머물게 하지는 않는다. 실천이 필요한, 오늘을 살게 하는 일이고, 나를 잡고 있던 것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 내일을 상상하게 하는 일이다.


내면을 들여다 보는 과정을 통해 쓰고, 그리며 할머니들은 소녀처럼 웃음지었다. 출처: 순천그림책도서관 


출판사에서 짧지 않은 시간 편집자로 일하며 누군가에게 글을 쓰라고 독려하는 일을 했다.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특별할 게 없다고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늘 이야기해왔다.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온 그 시간을 글로 쓰다 보면 놓쳤던 의미를 발견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 하시는 일에도 삶에도 도움이 되실 거예요.” 감사하게도 그 이야기는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글을 써낸 저자들의 입을 통해 내게 돌아오곤 했다. 책이 잘 팔리면 물론 더 좋겠지만,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읽어내는 경험만으로도 그 가치는 결코 소소하지 않다. 누구라도 하루하루 발걸음이 무겁다면, 지금 마음을 잡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 찬찬히 써 보라고 하고 싶다. 그 작은 행위가 오늘을 움직이는 힘이 될 것이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사는 것은 ‘오늘’뿐이다.


기록할 가치가 없는 삶은 없다. 늦었나 싶지만, 괜찮다. 그만큼 풀어낼 이야기가 쌓였을 테니까. 희미해져서 주저되지만, 괜찮다. 살아 있는 기억은 기록하며 선명해지고 오래 남을 테니까. 누가 봐줄까 하지만, 괜찮다. 내가 무수히 들여다보고 또 되짚어 볼 테니까. 단지, 지금, 시작한다면, 모두 괜찮다. 

장혜원 출판 편집자

읽고 쓰는 삶에 관심이 많다. 나만의 속도와 밀도로 살기 위해 서울을 떠나 바닷가 도시에서 살고 있다. 출판사 남해의봄날 편집자로 일하며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등의 책을 만들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마음을 다해 하루하루 자신만의 길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듣는 일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