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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유독 길게 느껴진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엔 눈이 내렸고, 봄비 내리고 싹이 튼다는 우수에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기온이 내려갔다. 이제 곧 3월인데도, 봄이 더디 오는 듯 싶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훈풍이 불고 꽃이 필 것이고, 코로나 바이러스도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에 마음만은 여유롭다.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Beethoven, Symphony No.6 in F major, Op.68 'Pastoral'
그늘진 한 구석에 아직도 눈이 남아있는 마당을 거닐다 보면 꽃들이 피어나고 나비와 벌, 그리고 딱새들이 다시 찾아와주는 봄날을 그려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교향악> 중 한 대목이 떠오른다.
“목사님께 보이는 것들은 정말 그것만큼 아름다운가요?”
“무엇만큼 아름답다는 말이니? 얘야.”
“그 〈시냇가의 풍경>만큼 말이에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연주회장을 나온 뒤 한동안 황홀경에 빠져있던 장님 소녀 제르트뤼드가 침묵을 깨고 목사에게 질문한다. 목사는 그 교향곡의 화음들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에 즉답을 피한 채 대답했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리는 행복을 모른단다.”
“그렇지만 볼 수 없는 저는 듣는 행복은 알아요.”
때론 현실보다 상상 속 풍경이 더 아름답게 꾸며지기도 한다. 회색빛 황량한 겨울 마당을 뒤로하고 눈을 감은 채 ‘전원 교향곡’을 다시 들어볼 참이다.
베토벤이 전원교향곡을 탄생시킨 오스트리아 빈 하일리겐슈타트 근교의 풍경
베토벤의 작품세계는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음악가에게 치명적인 청각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작곡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1802년)’ 사건 이후 약 7년, 소위 ‘걸작의 숲’이라고 말하는 기간 중 그가 발표한 작품들을 차례대로 나열해 보기만 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등 서양고전음악의 거의 모든 악곡 양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곡들이 이 짧은 시기에 탄생했다. 작품번호(Opus, 약어 Op.) 순으로 나열해 본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을 수 있다는 판정을 받고 죽음의 불안에 싸여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남긴 유서. 25년 뒤, 베토벤 사후 공개된 내용을 통해 그가 이때부터 죽음에 대비하기 시작했음이 알려졌다. -편집자 주
Op.55, 교향곡 3번 ‘영웅’ (1803년) Op.56,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 (1804~5년) Op.57, 피아노 소나타 ‘열정’ (1804~5년) Op.58, 피아노 협주곡 4번 (1805~6년) Op.59, 현악사중주 ‘라주모프스키’ (1806년) Op.60, 교향곡 4번 (1806년) Op.61, 바이올린 협주곡 (1806년) Op.62, 서곡 ‘코리올란’ (1807년) Op.67, 교향곡 5번 ‘운명’ (1805~7년) Op.68, 교향곡 6번 ‘전원’ (1807~8년) OP.69, 첼로 소나타 3번 (1808년) Op.70, 피아노 삼중주 ‘유령’ (1808년) Op.7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1809년) |
이 작품들 중에도 중심에 위치한 곡이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다. 같은 시기에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교향곡을 그것도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베토벤의 위대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에덴낙원메모리얼리조트 가든은 사계절 다른 전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교향곡의 대명사 격인 ‘운명’은 인간적인 반면, 거의 같은 시기에 작곡한 ‘전원 교향곡’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운명’은 고난과 갈등, 거기서 벗어나려는 투쟁과 몸부림,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인간의 승리를 그려낸 곡으로 구성과 내용 면에서 가장 완벽한 교향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에 비해 ‘전원’에서는 인간세계에서 느끼는 갈등과 투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원pastoral’이라는 제명은 베토벤 자신이 직접 붙였다. 그리고 각 악장에도 별도의 부제를 적어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베토벤 자신이 ‘회화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듯이 단순히 사물이나 풍광을 묘사한 음악은 아니지만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 낭만주의 음악가들에 의해 발전된 ‘표제음악’의 선구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즐거운 기분
2/4박자의 악장이지만 반 박자 쉬고 음악이 시작된다. 못갖춘마디로 서주부 없이 현악으로 여리게 제시되는 1주제는 아주 상쾌하다. 이어 점차 기분이 고조되고, 모든 목관악기들이 동원되어 현악과 어우러진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봄날 한가로운 전원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현악과 관악이 총동원되어 힘차게 울릴 때는 어김없이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2악장 시냇가의 정경
시냇물은 빠르게 흐르지 않는다. 부드럽게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지만 어느 곳엔가는 제법 커다란 연못을 만드는 듯, 풍성한 현악기들의 울림이 다채로운 물의 흐름을 그려낸다. 끝 부분에서는 새들도 찾아와 시냇가의 정경이 더욱 정겹다. 나이팅게일(플루트), 메추리(오보에), 뻐꾸기(클라리넷)의 울음소리가 시냇물소리와 어울려 평온한 전원의 모습을 그려내며 끝을 맺는다.
-3악장 시골 사람들의 즐거운 모임
알레그로allegro의 빠르기로 흥겹게 시작한다. 사람들이 점차 많이 모이는 듯 흥겨움은 고조되고, 익살스런 관악기들의 울림은 마치 잔치를 벌이는 듯하다. 1,2악장에서 볼 수 없었던 트럼펫의 힘찬 울림까지 합세해 분위기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현악기가 불길한 선율들을 만들어 내면서 중단 없이 4악장으로 넘어간다.
-4악장 폭풍우
팀파니, 그리고 관악기 중 가장 성량이 큰 트롬본까지 합세해 엄청난 폭풍우를 몰아온다. 중간에 잠시 잦아들다가도 이내 세찬 바람에 천둥, 번개까지 동원한 폭풍우가 다시 몰아친다.
-5악장 목가, 폭풍이 지나간 뒤의 기쁨과 감사
3분여의 짧지만 강렬했던 폭풍우가 잦아들면서 팀파니의 울림도 멀어져간다. 클라리넷과 호른의 목가적인 선율로 시작하는 5악장은 다시금 1악장에서처럼 상쾌하고 여유롭다. 폭풍우 뒤의 전원 풍경이라 1악장에서와 같은 들뜬 마음은 없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 준 신께 감사하는 듯 장엄하기까지 하다.
곧 찾아올 아름다운 에덴가든의 봄 풍경
비록, 귀가 들리지 않은 내면의 상태에서 창조해 낸 전원의 모습이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산책을 즐겼던 베토벤이 그려낸 그것은 장님 소녀가 꿈꾸는 자연의 모습과도 닮아있지 않을까? 그 풍경은 오늘날 음악가들의 손끝에서 다시 생생하게 태어난다.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과 바렌보임의 연주로 전원의 봄을 그려 보시길 바란다.
♪ 음악 들어보기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Beethoven, Symphony No.6 in F major, Op.68 'Pastoral'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지휘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격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