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가든은 에덴낙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은 회원님들의 삶을 기록하고 기리는 프로젝트입니다.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고인의 삶을 재구성하고 조명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지난 11월 영면에 든 국민 원로 배우 송재호 님입니다. 언제나 인자한 인상으로 ‘국민 아버지’라 불렸던 고인의 인생은 우리에게 여전히 깊은 감동을 줍니다. 배우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삶을 돌아봅니다.
송재호. 사진 제공: 씨네21
■ 북에서 온 소년, 배우를 꿈꾸다
1937년 3월 1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송재호는 1·4 후퇴 때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연기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다. 고교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한 그는 연기뿐 아니라 영화 제작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부산 지역 영화평론 모임에 가입하고 시나리오 공부를 위해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했을 정도. 이런 열정은 훗날 후배 영화인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1930년대 송재호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이가 배우 송재호다.
1959년 부산 KBS의 성우로 먼저 데뷔한 송재호는 연기를 향한 일념 하나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영화계에 입문했다. 박종호 감독의 1964년작 <학사주점>을 시작으로 당대 최고의 영화 감독으로 손꼽히는 이만희 감독의 작품에서 조연을 맡으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1975년 주연으로 출연한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가 서울 관객 36만 명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거뒀고, 대중들에게 그의 이름 석자가 또렷이 각인됐다. 브라운관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했다. 1968년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된 그는 무려 86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드라마 ‘현해탄은 알고있다’에서 ‘아로운’ 역을 맡았다. 이후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안방극장의 단골 배우로 자리매김했으며, 특유의 푸근하고 선한 인상을 앞세워 ‘국민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특히 김수연 작가가 쓴 <부모님 전상서>에서 송재호는 장년층 배우 특유의 근엄하고 묵직한 연기를 선보이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잠시 떠났던 스크린으로 돌아온 건 2000년의 일이다. 영화 <무사>로 영화계에 복귀한 그는 <살인의 추억><그때 그 사람들><해운대> 등 최고의 작품들에 출연하며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연기 욕심과 열정이 대단한 분이었다. 갓 두 번째 영화를 찍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감독에게 선생님은 언제나 존댓말로 대하며 많은 격려를 해주셨다.”
- 봉준호 감독, <씨네 21>과의 인터뷰 중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베테랑 신동철 반장 역을 맡았다. 출처: 네이버영화
그의 열정은 스크린 밖에서도 이어졌다. 1978년 서울에서 열린 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는 한국이 개최한 최초의 세계선수권대회로 알려졌는데, 당시 대회 현장에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찍은 송재호는 사격에 푹 빠지게 됐고, 이듬해 아예 사격에 입문해 말 그대로 전국체전을 휩쓸었다. 금, 은, 동메달을 섭렵한 그는 국제사격연맹 심판 자격증까지 취득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심판으로 활동했다. 또한, 대한사격연맹 부회장으로 역임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2014년 직접 야생생물관리협회 회장을 만들고, 작고하기 전까지 회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 사격에 관한 관심이 불법 밀렵을 향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진 까닭이다. 실제로 2000년부터 밀렵감시단장을 지내며 꾸준히 감시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다양한 경험과 활동이 세상과 인간을 향한 이해로 이어졌다. 이처럼 송재호는 56년 배우 인생 동안 한결같이 열정적이고, 수수하며, 담백한 모습으로 대중의 곁을 지켰다.
■ 브라운관 밖의 아버지
아마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배우’ 송재호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송재호는 어땠을까?
“그냥 TV에서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였어요.”
용인시 아멘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는 송영춘 목사는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한다. 슬하에 4남 1녀를 둔 그는 브라운관 속 ‘국민 아버지’의 모습으로 인자하게 가족을 보살폈다. 특히 아내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아내 심경자 권사와 함께.
“아내는 제 첫사랑입니다. 52년을 함께 살고 있는데 요즘은 제가 죽고 못 살아요. 아내가 뭐라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죠(웃음).”
- 故 송재호, 2011년 YTN 뉴스와 인터뷰 중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속 송재호.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치매에 걸린 아내(김수미 역)를 돌보는 순애보 남편 ‘군봉’ 역을 맡았는데, 극 중 배역이 다정다감했던 실제 모습과 꼭 닮았다는 후문. 송영춘 목사는 어머니 임종 당시 아버지도 곧 떠날 것을 직감하기도 했다. “두 분은 단순히 금슬이 좋다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마음도 애틋했다. 자녀의 입영통지서와 입대 전날 깎았던 바리깡마저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을 정도다(송영춘 목사는 자신의 에세이집 <마음을 벗기다>에서 이 내용을 짤막하게 언급했다). 비록 말수 적고 표현 서툰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아버지였지만, 자녀들을 언제나 기도로 지켰다. 그런 그이기에 2000년 교통사고로 막내아들을 먼저 떠나보냈을 때 느낀 충격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앙의 힘은 슬픔보다 강했다. “막내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기도는 ‘제게 왜 이러십니까?’가 아니었어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였죠.” 당시 뇌경색으로 쓰러졌지만, 불과 일주일 만에 퇴원한 그를 보며 병원에서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마치 욥과 같이 송재호는 시련이 닥칠수록 더욱 하나님에 매달렸다. 그 믿음의 유산이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 늘 겸손했던 신앙인
‘배우’만큼이나 그를 잘 설명하는 수식어가 ‘장로’ 송재호다. 1979년에 개종한 그는 이후 평생을 겸손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았다. 하나님과 만남은 배우 인생 못지않게 드라마틱했다. 원래 그의 집안은 아침마다 불경 소리가 들릴 정도로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내와 송재호의 꿈을 통해 이 가정에 문을 두드리셨다. “하나님이 먼저 만나 주신 건 어머니였어요. 꿈을 통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체험하셨죠.” 송재호가 교회에 나간 건 그로부터 꼭 일주일 뒤다. 송영춘 목사는 이때 역시 꿈을 통해 하나님이 아버지께 역사하셨다고 말했다.
“홍수로 강이 범람하는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는 이쪽 편에, 다른 가족들은 저쪽 편에 있었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찰나 벌거벗은 아기가 나와 아버지 보고 ‘(걱정하지 말고) 차를 몰고 건너가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 행한 결과 가족들을 모두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는데, 모든 과정을 지켜본 아이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하셨어요. 아기 천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변화는 놀라웠다. 교회에 출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발적으로 금식 기도원에 들어가고, 술과 담배 역시 단숨에 끊었다. 경건하게 새벽 예배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1980년부터 ‘강남 성결교회’, ‘갈보리 교회’를 섬기다가 91년부터 나가기 시작한 집 앞 교회가 강동구의 오륜교회다. 지금은 교세가 확장됐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상가건물 한 층에 세를 든 교인 십여 명의 작은 교회였다. 그는 개척 교회에 큰 힘이 되는 성도였다. 평생 예배와 십일조를 철저하게 지켰으며, 매일 아침을 기도와 성경 필사로 열었다. 바쁜 배우 생활 가운데서도 교회 일이라면 항상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앞장섰다. 인생의 풍파가 밀려올 때마다 신앙을 버팀목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일상이 곧 신앙이었던 그의 이런 태도 덕분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깊어진 것은 연기만이 아니었다. 믿음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해졌다. 2020년 11월 7일. 그는 평안히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향년 83세. 그곳에는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었다. 송영춘 목사는 “목사인 나조차 마지막 순간을 저리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고인이 장로로 지냈던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가 11월 10일 영결식을 집례했고 유가족 및 교인들이 참석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 이사야 41:8
에덴낙원 봉안단에는 이 말씀이 새겨졌다. 대중에게 그는 ‘배우’였지만, 가족들에게는 ‘믿음의 조상’이었다. 참 안식을 얻은 송재호에게 분명 하나님은 손을 내밀며 ‘나의 벗’이라 부르셨을 것이다.
도움말 송영춘 아멘교회 담임목사
참고 자료 <씨네21> 1281호 ‘사나이, 아버지, 그리고 배우… 故 송재호 배우를 추모하며’
*인더가든은 여러분의 사연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가족, 본이 되는 신앙인으로 고인의 삶을 기록하고 싶은 분은 eb.hwang@frum.co.kr 로 메일을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