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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그곳에 가면 #7 낮은 데로 임하는 건축



지치고 힘든 나그네 같은 인생 길.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두 팔 벌려 안아 주셨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고 나눠야 하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행해야 할 마땅한 임무다. 이달 정지연 <브리크> 편집장이 소개하는 다양한 인도주의 건축은 실천하고 나누는 삶의 본보기가 되어준다.



잠시 진정되나 싶었던 코로나 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요즘이다. 전 인류가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으며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기 안위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게 되었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은 이와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 힘든 이웃에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우리가 되기를. 고통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진행되었던 인도주의 건축 프로젝트는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의 정신과 무척 닮아 있다.


종이로 만든 하나님의 성전,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

2011년 뉴질랜드 남동쪽에 위치한 크라이스트처치 지역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규모 6.3의 대지진이 일어나며 도시가 쑥대밭이 된 것이다. 17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이 자연재해는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대성당도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고딕 복고양식으로 지었던 이 성공회 교회는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지역민들의 신앙의 터전으로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았기에 그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건축가 반 시게루는 한걸음에 재해 현장을 달려간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남은 지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성당을 빠르게 복구해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상황. 동시에 언제 올지 모를 여진에 다시 무너지지 않을 안전성도 확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가 내놓은 해법은 종이 판지를 활용해 성당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처음 지역민들은 이 계획에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시간과 안전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라는 데에 결국 동의했다.


크라이스트 처지 대성당 외관 ⓒBridgit Anderson

크라이스트 처지 대성당 내부 ⓒchristchurchdailyphoto.com

사실 반 시게루는 이미 이전부터 종이를 재료로 한 자연친화적 건축에 대해 상당한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었다. 전세계 재난 및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종이와 대나무, 천, 플라스틱 등 값이 저렴하고 재활용이 가능한 자재로 난민 보호소를 지어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1957년 도쿄에서 태어난 시게루 반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뉴욕의 쿠퍼 유니온 건축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한 가구 전시 디자인을 맡아 진행하던 과정에서 건축의 새로운 재료로서 종이 튜브의 가능성을 깨닫고, 이후 이를 이용한 건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종이 건축물은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을 위한 보호시설. 폐휴지를 재활용해 프레임을 만들어 폴리우레탄으로 표면 방수 처리를 한 다음, 골조의 재료로 삼아 임시 주거시설을 완성했다. 같은 방법으로 1995년 일본 고베 지진 때에도 종이 튜브로 보호소와 교회를 짓기도 했으며, 뜻을 함께하는 건축가들을 모아 VAN(Voluntary Architects Networks)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해 전 세계를 돌며 구호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시게루는 친환경 소재인 종이로 건축물을 지어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christchurchdailyphoto.com

복원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은 판지를 말아 만든 둥근 기둥들이 박공지붕을 이루고 있다. 자연광과 바람을 자연스레 교회 안에 스며들게 한 것.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친환경적인 건축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혁신적인 디자인을 통해 인도주의를 꾸준히 실현한 그의 공헌을 인정해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평가받는 프리츠커상 위원회는 2014년 수상자로 그를 선정했고,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아 오늘까지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두 배의 가치를 지닌 반쪽짜리 집, 킨타 몬로이
‘소중한’ 공간’, ‘좋아하는 공간’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가장 ‘필요한 공간’이 집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77억 인구가 모여 사는 21세기 지구에서도 집은 여전히 생활을 영위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간이다. 남아메리카 칠레 북부의 항구도시 이키케Iquique에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반쪽짜리 좋은 집(half of a good house)’이 있다. 칠레 정부가 국민들을 위해 싸고 저렴한 집을 공급하기 위해 추진했던 ‘킨타 몬로이Quinta Monroy’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사회 참여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는 알레한드로 아르베나가 함께 했다.

이키케에 지은 공공 주택 외관

당시 칠레 정부는 도시의 성장 과정에서 늘어나는 유입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빠르게 대량으로 주거시설을 공급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골칫거리가 되는 도심 내 슬럼 지역을 재개발해야 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10만 호에 상당하는 주거시설을 저비용으로 확보하기 위해 고민하는 칠레 정부 담당자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이가 바로 알레한드로 아르베나. 그런데 그의 제안은 다소 엉뚱했다.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Cristobal Palma

그는 완벽하게 완성된 집이 아닌, 기초 골조와 전기, 수도 등의 인프라만 구축해 놓고 확장이 가능한 빈 형태의 반쪽짜리 집을 새로운 공공 주거 모델로 제시했다. 즉 정부가 미완의 공공 주택을 저렴한 비용으로 공급하면, 입주한 이는 자신의 경제적 여력과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필요한 시설과 나머지 공간을 채워나가는 방식이다. 이 아이디어는 당시 칠레의 도시 빈민들의 일상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다. 당시 이들은 빈민촌에 직접 집을 지어 사는 게 일반적이었다. 다시 말해 멋지고 아름다운 집은 아니어도 몸을 누일 거처 정도는 직접 만들 능력이 있었다. 건축가는 이런 이들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았고 결국 이러한 집을 짓기에 이르렀다. 사실 아르베나의 이런 해법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건축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고, 고민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공주택 외부 ©Tadeuz Jalocha


주택 내부 모습. 주민들이 직접 자기 공간을 가꾸는 것을 볼 수 있다. 위 ©Ludovic Dusuzean 아래 ©Tadeuz Jalocha

전혀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았던 해법을 받아들인 끝에 칠레 정부는 골칫거리였던 도시 빈민의 주거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게 됐다. 칠레 정부와 아르베나의 이 결과물은 도시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평가받으며 대표적인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했다. 알레한드로 아르베나는 “좋은 건축은 벽돌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비싼 재료와 화려한 형태가 아니라, 공간을 사용하게 될 사람을 최우선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 건축가가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더 나은 주거, 이케아
‘더 나은 주거(Better Shelter)’는 스웨덴의 여러 재단과 기업, 교육기관과 유엔난민기구가 합작으로 세운 사회적 기업이다. 이들의 목표는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셸터를 전문으로 디자인하는 것. 여기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난민들도 포함된다.

더 나은 주거가 난민을 위해 만든 셸터 외부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기업 이케아IKEA가 설립한 이케아 파운데이션의 합류는 이 셸터 프로젝트를 한 단계 격상시켜주었다. 특히 이케아의 조립 방식을 활용한 획기적인 셸터 디자인이 국경 난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가볍고, 짧은 시간 안에 조립할 수 있으며, 제작 비용이 저렴한 셸터를 제작했는데 이는 언제 어떻게 이동할지 모르는 국경 난민이 머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저렴하고, 가볍고, 조립과 운반이 쉬운 브랜드의 특성을 영리하게 활용한 것이다. 이 가건물은 현지 기후조건을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갖췄고 단열과 방음, 환기도 유리하며, 태양열 설비도 갖추고 있어 유지관리 측면에서도 획기적이었다. ‘더 나은 주거’가 제작한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2013년 소말리아 난민캠프에 적용됐고, 2015년에는 이라크, 시리아, 네팔, 아프리카 등지로 약 5,000개가 공급됐다.



이케아가 최근 서울 성동구에 문을 연 ‘이케아 랩’ ⓒIKEA

이케아의 이같은 경험과 정신은 핵심 비즈니스인 주거 라이프스타일 솔루션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다. 최근 이들은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사회적 가치를 제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중. 최근 성수동에 오픈한 팝업 스토어 ‘이케아 랩’에서도 이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스토어의 슬로건 역시 ‘더 나은 주거와 지속가능성’. 이들은 도심형 접점 매장을 만들면서 대나무, 재활용 플라스틱 등 지속가능한 소재를 활용한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축의 과정에서 사람을 중심에 두는 인도주의 건축은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고 있다.

정지연 <브리크brique> 편집장

브리크컴퍼니 대표. 공간 라이프스타일 미디어 <브리크brique>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정치학사를, 고려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를 각각 취득했다. 방송 구성작가, 신문기자, 뉴미디어연구소장 등을 거쳐 2017년 6월 브리크컴퍼니를 창업했다. 온오프라인으로 발행하는 <브리크brique>는 도시와 공간, 사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축은 기술이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 삶 그 자체임을 깨달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