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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4

그곳에 가면 #4 한옥 교회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세상이 혼탁해지고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마다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예수의 정신과 말씀을 뜨겁게 품었던 첫 마음을 되새기자는 의미. 분명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기 전까지 견뎌내야 했던 박해와 시련의 과정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본다면 누구나 숙연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120여 년 전 세워진 초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 정신을 잇고자 전통 방식으로 지은 한옥 교회를 둘러보는 것도 첫 마음을 되새겨 보는 데 좋은 단서가 될 것이다.



한옥 교회의 시초,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본원의 성전은 예수를 마음에 둔 사람들의 모임이겠지만, 공간이 담당하는 역할과 만들어내는 정서는 사람들에게 무시 못 할 영향을 미치기에 교회 건축은 분명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 건축은 서양의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국적 없는 건축이 됐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실제로 주위만 둘러봐도 정말 다양한 양식이 혼재된 교회 건축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초기 교회들은 어땠을까? 당시 교회들은 빠른 정착을 위해 전통 건축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1900년에 지어진 강화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로, 전통 한옥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초 한옥 교회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강화군청

골조는 나무로 만들고 외관은 벽돌로 쌓은 뒤, 연꽃 문양의 서까래에 기와를 얹은 모양새가 얼핏 불교의 사찰처럼 보이나, 강화성당은 로마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 대예배당으로 사용됐던 바실리카bacilica를 본 떠 만들었다. 즉 서양식 건축을 접목하면서 한식 목조 양식을 중점적으로 채택함으로써 현지화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의 바실리카를 본 떠 한옥에 접목한 강화성당 예배당 ⓒ강화군청

건립자이자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C. John Corfe가 교회의 골조로 삼은 적송은 백두산에서 벌목해 압록강에 배를 띄워 조달했고, 경복궁 건축에 참여했던 도편수가 설계를 맡았다는 유래도 지역의 영웅담처럼 내려온다. 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일부가 유실됐으나 초기 모습에 가깝게 복원됐다. 이어 성공회 신학교인 성미가엘신학교가 설립돼 선교의 중심 역할을 했고, 한옥 교회가 지닌 가치까지 더해져 강화도는 우리나라 성공회의 본향이자 본산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런 평가에 힘입어 강화성당은 지난 1981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2001년에는 사적 제424호로 각각 지정됐다.


역사와 한옥 성당이 지닌 가치까지 더해져 경기도 유형문화재에 이어 사적 제424호로 지정됐다. ⓒ강화군청

장로교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된 김제 금산교회
김제의 금산교회는 1908년 미국인 테이트 선교사가 지역민들과 함께 설립했다. 교회의 내부 구조는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것이 ㄱ자형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 이처럼 유별난 모양새를 가진 데에는 당시에 남아 있던 유교적 관습의 영향이 크다. ㄱ자 형태에서 남쪽은 남성 교인들의 자리, 동쪽은 여성 교인들의 자리로 나누어져 있다. 나무 기둥에 적힌 성경 구절도 남자 석에는 한문, 여자 석에는 한글로 각각 쓰여 있어 남녀를 구분해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ㄱ자형 한옥으로 설계된 ‘김제 금산교회’ ⓒ전라북도 공식 블로그

금산교회는 한국전쟁 당시에도 피해를 보지 않아 초기 예배 모습과 역사적 가치가 높은 다양한 사료들이 잘 보존 및 비치되어 있다. 설립자인 선교사 부부의 사진, 초대 장로가 선출되는 과정에 대한 자료, 장로회가 주축이 돼 진행한 1917년 당회록 등이 보존되어 있어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예배를 드리도록 공간과 좌석이 구분돼 있다. ⓒ전라북도 공식 블로그

금산교회에는 기독교 정신을 드높여 알린 유명한 일화가 있다. 교회가 뿌리 내리기 위해 발 벗고 뛰었던 공헌자 중 초대 장로를 뽑는 투표가 열렸는데, 지역의 부호이자 양반이었던 조덕삼 씨가 아닌 그 집의 하인 이자익 씨가 장로로 선출된 것. 투표 결과를 두고 여러 우려가 있었지만 조 씨는 흔쾌히 이 씨를 장로로 지지했고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결국 이자익 씨는 금산교회의 담임목사까지 되었는데, 신분의 귀천보다 기독교 정신과 가르침을 더 중요히 여겨 자신을 낮추고 몸소 실천한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회자가 된다. 금산교회는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됐고, 현재 별도로 전시관을 갖춰 방문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금산교회 전시관에는 120여 년의 역사가 담긴 각종 사료가 보관돼 열람할 수 있다. ⓒ전라북도 공식 블로그

배움의 터전이 된 영천 자천교회
경상북도 영천의 자천교회는 기독교 사적 2호로 선정된 유서 깊은 교회다. 대한제국 말 개신교가 전래한 이래 초기 교회의 모습을 이어가고 있으며 전통 한옥 양식의 예배당을 보존하고 있다. 이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교회로도 지정돼 유적지에 버금가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기독교 사적 제2호인 ‘자천교회’ ⓒ영천시 공식 블로그

자천교회 주변은 전형적인 산골의 모습이다. 태백산맥을 따라 준엄한 산세의 산과 천으로 둘러싸인 청정지역이다. 이런 산골에 교회가 자리 잡기까지는 초기 신도들의 열성적인 헌신이 뒷받침 됐다. 초가집을 빌려 젊은이들을 가르치던 서당 겸 예배당으로 시작한 자천교회는 이후 목조 예배당을 짓고, 주일학교에 이어 소학교도 운영하면서 신학문과 교리 배움의 터전이 된다.

자천교회는 학문의 배움터이자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영천시 공식 블로그

또 자유 사상을 전파해 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어 넣고 독립운동가를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으로 나누어져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열매가 되어 믿음의 터를 세운’ 권헌중 초대 장로의 정신을 되새기며 문화재로 인정받아 오늘날처럼 자리매김하게 된다. 현재는 교회 옆 고택을 기증받아 신성학당이라는 전통 한옥 교육관을 운영하고 있고, 기독교 역사 교실, 문화 체험 교실 등으로 많은 방문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자천교회 전경. 현재는 전통 한옥 교육관과 기독교 역사 교실, 문화체험관 등으로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다. ⓒ영천시 공식 블로그

친환경 한옥교회, 관촌성결교회
전북 임실면에 있는 관촌성결교회는 농촌 지역에 있는 소형 교회다. 2015년에 지은 교회가 한옥 양식을 띠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실은 치즈 등 농산물로 유명한 지역이다. 자연환경 또한 뛰어난 곳이다. 교인들은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후세에도 도움이 될만한 친환경적인 교회를 짓고자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한옥 교회다. 문제는 한옥으로 교회를 짓는 사례가 희귀하다 보니 일을 맡아줄 건축사무소를 찾기 어려웠고, 건축비와 공사 기간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공사에 필요한 일손을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돕기로 해 인건비의 상당액을 절감했다.


친환경 교회로 짓기 위해 한옥 건축양식을 택한 ‘관촌성결교회’ ⓒ크리스천 전북

관촌교회는 한옥처럼 기둥과 서까래 등을 음각과 양각으로 끼워 넣었고 나무와 흙, 돌 등 천연재료를 사용했다. 국산 편백나무를 깔고 대나무에 황토를 발라 벽을 만들었다. 성도들의 건강과 건물 관리의 효율성을 고려한 것이다. 그 덕분에 교회는 임실의 새로운 명물이 됐다. 한옥으로 지은 교회가 지역을 빛내며 교인들을 모으는 구심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합심하는 공동체, 지역과 이웃을 섬기는 자세 등 교회 건축에 얽힌 일화들이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한옥 교회를 짓기 위해 성도들이 직접 건축에 일손을 보태기도 했다. ⓒ크리스천 전북

정지연 <브리크brique> 편집장

브리크컴퍼니 설립자, 공간 라이프스타일 미디어 <브리크brique>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정치학사를, 고려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를 각각 취득했다. 방송 구성작가, 신문기자, 뉴미디어연구소장 등을 거쳐 2017년 6월 브리크컴퍼니를 세웠다. 온오프라인으로 발행하는 <브리크brique>는 도시와 공간, 사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축은 기술이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 삶 그 자체임을 깨달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