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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0-08-12

엄선한 공간들로부터 배우는 비움의 미학, <더 터치>



현대인의 삶은 채움의 연속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해 채워놓은 물건들이 우리를 숨 막히게 만든다. 그런데 그게 과연 정답일까? 우리는 그 속에서 진정한 삶과 위로 행복을 느끼고 있나? 이런 의문이 든다면, <더 터치: 머물고 싶은 디자인>(윌북 펴냄)(이하 <더 터치>)를 펼쳐 보길 권한다.



퇴근해 돌아와 눈에 들어온 집은 심란했다. 한 마디로 시각적인 아수라장. 신문과 책은 바닥에 널려 있고 곳곳에 벗어 놓은 옷들이 잔뜩이다. 정리 못 한 택배 상자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집에 돌아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쉴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물건들을 어떻게 치워야 하나 고민만 더 커질 뿐이다. 사무실도 별다른 차이는 없다. 책상 위에는 서류에 자료 더미가 쌓여 있고 바닥에는 촬영용 소품과 샘플들이 잔뜩. 각성 효과를 주는 형광등을 24시간 내내 켜놓고 에어컨과 히터의 도움을 받아 문과 창문을 꼭 닫아 놓고 늘 비슷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한 채 살아가다니, 스스로 통조림이 되기를 자청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내가 거처하는 공간은 내 삶을 담는 그릇. 각종 소셜미디어를 통해 화려하게 치장한 많은 공간이 소개되고 있지만 잠시 유행으로 끝나고 말 곳들이 대부분이다. 내년 이맘때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또 새로운 공간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요란하지도, 경박하지도 않고 시간의 흐름에 굳건히 맞서며 우리를 숨 쉬게 해주는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면 최근 출간된 <더 터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는 유명 매거진 <킨포크>와 북유럽 디자인의 정수를 탐구하는 덴마크의 디자인 스튜디오 ‘놈 아키텍츠Norm Architects’가 전 세계의 주요 도시에서 호텔, 레스토랑, 학교, 박물관, 숍 등 마음이 쉬어갈 수 있고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 25곳을 선정해 모아놓은 책이다.



배를 타고 도착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세상과 잠깐의 기분 좋은 단절을 느끼게 해주는 교토의 호시노야 료칸, 북아프리카의 건축 자재와 기법을 사용해 주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모로코 마라케시의 이브 생로랑 박물관, 휘황찬란한 현대적 건물로 대표되는 미술관들 사이에서 겸손함의 미덕을 지닌 덴마크 코펜하겐의 루이지애나 미술관 등이 등장하는데, 반갑게도 서울의 아크네 스튜디오 매장과 아름지기 재단 사무실도 포함되어 있다.



<더 터치>는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구성하는 5가지 기본 요소로 빛, 자연, 물질성, 색 그리고 공동체를 꼽았다. 빛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머물러야 하고, 공간 속에서 자연의 흐름이 느껴져야 하며 공간을 구성하는 각각의 질감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들은 자극적이지 않고 휴식을 선사하는 색감을 배경으로 사용하며, 공동체 개념을 통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주는 곳이어야 오랜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공간에는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빼기와 덜어내기를 기본 철학으로 삼아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만 갖춰 놓았다는 것.




"건물을 짓는 것이 건축의 전부가 아니고 무언가를 없애는 것도 건축이 될 수 있다."
오래된 건물의 불완전한 상태를 요란하게 고쳐 무언가를 더하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것만을 잘 정리한 밀라노의 ‘데 코티스 레지던스De Cotiis Residence’를 설명한 문구다. 이 글귀처럼 좋은 공간은 삶 그 자체가 집중되는 장소이며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경이 되어야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와 반대로 살고 있다. 사무실이건 작업실이건 그 공간을 무언가로 채워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려 비싸고 화려한 가구를 들이고 온갖 장식품을 더하고 끊임없이 치우고 정리하고 버리고 새로 산다.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르고 만든 자기만의 공간에서 정작 별 쓸모도, 의미도 없는 물건들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고 이를 감당하느라 하루하루 분주하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다가 마침내 소멸한다.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물질들은 시간에 따라 그 아름다움을 더해가는데, 시간의 흔적이 특별함을 더해준다. 회반죽을 바른 벽이나 플라스틱처럼 인간이 만든 것들은 아름답게 바래지 않는다. 인위적인 건축물과 장식이 멋진 모습을 유지하려면 많은 관리가 필요하다."
건축가 요나스 비에어 폴센Jonas Bjerre-Poulsen의 말에 힘을 입어 비 내리는 주말 오후, 내내 비우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빛이 바래갈 것들만 남기는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물건을 덜어내고 그 자리를 햇빛과 바람으로 채운다면 청소와 정리로 번잡스럽던 몸과 마음에도 여유가 생겨, 정말 중요한 것들에 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게 되겠지’ 하고 기대하며.




김은령 <럭셔리> 편집장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디자인하우스의 라이프스타일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 기자 및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럭셔리> 편집장 겸 매거진 본부 본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밥보다 책> <Luxury Is> <비즈라이팅> 등이 있으며 <침묵의 봄> <설득의 심리학> <패스트푸드의 제국> <경영과 역사> <나이드는 것의 미덕> 등 30 여 권을 번역했다. 남편과 함께 라이프스타일 사이트 HER Report도 운영 중이다.